▲ 모내기 준비를 하는 중황마을 노인들. |
지리산 중턱 넘나드는 둘레길
마실길, 너덜길, 늠내길, 산막이길, 바우길…. 제주 올레길 이후 쏟아져 나온 각 지자체의 옛길들이다. 이 길들은 걷기 열풍에 일조하면서 계속해서 나름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지리산둘레길도 그 중 하나다. 지리산둘레길은 이름에서 보여지듯 ‘지리산의 둘레를 돌아가는 길’이다. 2007년부터 사단법인 ‘숲길’이 산림청의 녹색자금을 지원받아 복원하고 있는 지리산 장거리 도보길이다. 총 길이가 무려 300㎞에 달할 정도의 대장정이다. 옛사람들이 걸었던 이 길은 해발고도 1100m 지점을 넘나들며 전남, 전북, 경남을 두루 거치면서 지리산의 둘레를 돈다. 길은 마치 한옥과도 같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면 길은 곧 폐가처럼 풀에 묻히고 지워진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둘레길은 현재 71㎞ 구간이 새로 단장되고 개방되었다. 종주하려면 족히 2박3일이 걸린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숲이, 마을이, 산이 끊임없이 색다른 모습을 선보이는데 미리 정보를 확인한 후 마음에 드는 구간을 정해 걸으면 될 일이다. 그것이 두 시간이 됐든 하루가 됐든, 당사자 마음이다.
‘다랑이길’ 시작되는 매동마을
봄날의 둘레길은 매동마을에서부터 세동마을로 이어지는 구간이 좋다. 다랑논과 신록의 숲이 아름답다. 남원시 산내면에서 함양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도중에 중황마을, 등구재, 창원마을, 금계마을, 의중마을, 송대마을을 지난다. 총 길이는 21㎞. 6~7시간 거리다. 하지만 이도 버겁다면 다시 쪼갤 수 있다. 매동~금계, 의중~세동이 그것이다. 두 구간의 길이는 얼추 비슷하다. ‘다랑이길’로 불리는 매동~금계 구간이 약 1㎞ 더 긴 11㎞. ‘산사람길’인 후자는 10㎞다.
일단 기점인 매동마을에 든다. 마을 오른쪽 끝을 돌면 둘레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전에 마을의 담벼락 그림을 보고 출발하기로 한다. 허름한 집과 골목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04년 여름 ‘전북의제21’과 공공작업소 ‘심심’이 매동마을에서 진행한 ‘빈집에서 놀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벽에 나무가 그려지고 열매가 수북이 열렸다. 단지 빈집뿐만 아니라 골목의 담벼락이며 대문 등에도 새, 소녀, 풀, 꽃, 곰돌이 등의 그림이 걸렸다. 외양의 변화와 함께 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되면서 생기가 돌았다.
▲ 매동마을 외양간 소. |
예술작품 방불케 하는 다랑논
매동마을에서 콘크리트 포장된 임도를 따라 약 1㎞쯤 올라가자 드디어 숲이 나온다. 봄햇살이 따갑던 터라 숲이 반갑다. 이곳부터는 중황마을까지 숲길이 계속 이어진다. 숲의 나무들이 크고 울창한 편은 아니지만,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을 가리기에 부족함이 없고, 숲에서 내뿜는 알싸한 향기 또한 차고 넘친다.
중황마을 채 못 미쳐 숲에서 묵답을 만난다. 더 이상 일구지 않는 숲의 논밭이다. 묵답은 주변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난 후 묵답은 숲의 일부로 돌아갔다. 물을 가두기 위해 쌓은 돌담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옛 세월을 추억하고 있다.
중황마을에 이르러 숲길에서 나오자, 앞으로 펼쳐지는 것은 다랑논이다. 남해의 가천 다랑논이나 함양의 도마마을보다 더 규모가 큰 다랑논 지역이다. 아랫말인 하황에서부터 중황을 거쳐 저 높이 상황마을까지 다랑논이 이어져 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물고기비늘처럼 켜켜이 붙은 다랑논. 모내기를 위해 다랑논에 담긴 물이 마치 거울처럼 빛나며 하늘을 비춘다. 이 다랑논을 일구기 위해 이곳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을까. 논을 살피는 농부들을 보자 애잔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농부의 대부분이 70~80대 노인들이다. 여느 농촌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더 가슴이 아픈 것은 평야라면 이앙기를 이용해 모내기를 하고 콤바인으로 벼를 베련만, 이곳에서는 대개 수작업이다. 조그마한 논마다 기계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 그래서 힘없는 노인들이 지게를 진 채 모판을 나르고, 일찍부터 굽은 허리를 숙여 모를 심는다.
▲ 상황·중황·하황마을의 다랑논(위), 솔숲이 좋은 매동마을. |
다랑논을 감상하며 상황마을을 넘어 올라서면 등구재에 이른다. 거북이 등을 닮았다는 곳이다. 여기를 넘어서면 경남 함양으로 접어든다. 등구재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지점인 것이다. 길은 창원마을과 금계마을로 뻗는 동안 상황과 중황마을 못잖은 다랑논을 보여준다. 당산나무쉼터에서 발도 풀고, 마을로 잠시 내려가 물도 얻어 마시며 둘레길 걷는 재미를 즐긴다.
자, 여기 금계마을까지가 1차적 목표인 ‘다랑논길’이다. 길을 더 갈 것인가. 끝을 맺을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걷길 권한다. 세중마을까지 이어지는 ‘산사람길’이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어 힘이 들 수도 있겠지만, 지리산 능선을 곁에 두고 걷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다. 도중에 벽송사와 서암정사 등의 볼거리도 있다. 신라말기 창건한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곳이다. 절 앞에는 일제시대 때 세워진 목장승 한 쌍이 서 있다. 오른쪽에 있는 호법대신은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왼쪽에 있는 금호장군은 훼손이 심하다. 벽송사 인근의 서암정사는 칠선계곡을 마주하는 절경에 자리하고 있다. 서암정사는 화엄세계를 상징하는 마애불로 가득하다.
<여행안내>
▲길잡이: 대전-통영간고속국도 함양JC→88고속국도→지리산IC→인월면→60번국도→매동마을.
▲먹거리: 많이 걸으려면 든든히 먹는 게 중요하다. 단백질과 칼슘, 비타민 등 영양이 풍부하고 흡수가 빠른 추어탕은 추천할 만한 음식이다. 남원시 인월면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측에 자리한 흥부골추어탕(063-636-5686)은 남원추어탕을 제대로 끓여내는 집이다. 추어탕(7000원) 외에 추어세트정식(1만 2000원)도 권장 메뉴. 추어만두, 추어튀김 등이 달려 나온다.
▲잠자리: 둘레길 매동마을(011-524-5325), 창원마을(011-9536-5386, 011-9629-9677), 의중마을(010-8514-5310), 송전마을(019-463-5989) 등에서 민박을 놓는다.
▲문의:
■남원시 문화관광포털(http://tour.namwon.go.kr), 문화관광과 063-620-6165. 함양군 문화관광포털(http://tour.hygn.go.kr) 055-960-5555
■사단법인 ‘숲길’(http://www.trail.or.kr) 063-635-0850.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