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선거 패배 이후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이 긴밀한 접촉을 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대통령 인수위 시절 모습. |
이상득 의원은 한나라당 안팎에서 ‘형님 정치’ 비난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지난해 6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대신 이 의원은 상임위(국방위) 활동과 자원 외교에 힘을 쏟았다. 측근들이 이 의원에게 여러 차례 ‘일선 복귀’를 촉구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외곽에서 동생을 돕는 것도 보람이 있다.
정치에 개입한다는 오해도 안 받으니 일석이조 아니냐”며 일축했다는 후문이다. 비록 2선으로 후퇴했다고는 하지만 청와대 국무총리실 국가정보원 등 주요기관 요직에 이 의원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들이 포진돼 있다. 이 의원의 파워가 여전히 막강하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간 여권 내에선 ‘만사형통’(모든 일은 형으로 통한다)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을 정도로 ‘실세 중 실세’로 여겨졌던 이 의원의 컴백 가능성이 심심찮게 거론돼왔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당 내 이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왔던 이 의원 부재를 아쉬워했고, 청와대에 끌려 다니던 한나라당 역시 대통령과 직통 채널이 열려 있던 이 의원을 필요로 했다. 특히 지난해 11월 세종시 수정안과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점점 확산되자 당·청에선 그 어느 때보다 ‘이상득 역할론’이 탄력을 받기도 했었다(<일요신문> 916호 참조). 그러나 당시 정가를 뒤흔들었던 ‘한상률 게이트’에 이 의원이 연루됐다는 주장이 불거지면서 복귀는 무산된 바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이 의원은 지역구를 포함한 일부 TK(대구·경북) 지역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선거 막바지엔 판세가 불리하게 흐르고 있다며 청와대와 당 지도부에 ‘분발’을 촉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거 직전이던 5월 31일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여연)의 여론조사 결과를 체크한 이후엔 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민심의 이상기류를 전했다고 한다. 당시 여연이 조사한 바로는 서울·경기·인천 수도권 ‘빅3’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적극 투표층에서는 서울과 경기는 ‘박빙’이었고, 인천은 이미 역전된 상황이었다. ‘박근혜 없이도 이긴 선거’라며 일찌감치 표정관리에 들어갔었던 여권 주류에 뒤늦게 ‘비상등’이 켜졌고, 동시에 이 의원의 ‘역할론’도 급격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개표함 뚜껑을 열자 ‘설마’했던 한나라당은 경악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참패였다. 선거 직후 이 의원은 비공식적으로 청와대를 한 차례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은 이 대통령이 먼저 이 의원을 불렀다. 수습책 등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안다. 만난 후에도 전화통화를 수시로 하며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의원의 한 측근 의원 역시 “정권 출범 이후 최대 위기 아니냐. 이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이 의원이 가만있는 게 이상한 일”이라면서 “후반기 국정운영에서 이 의원이 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최근 이 대통령에게 국정 쇄신의 필요성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선거 후폭풍을 조기에 차단하지 못하면 레임덕은 물론 4대강 사업과 세종시 수정안 등 이 대통령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 현안들의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 또한 전당대회, 7월 재보선, 개헌 등 줄줄이 이어지는 정치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라도 이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의원이 이처럼 선거를 전후로 이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재가동한 것은 복잡한 당내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한나라 친이계의 한 초선 의원은 “선거에 대한 책임을 청와대가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불거지기 시작했고, 점점 확산됐다. 정중동 행보를 보이던 이 의원이 나선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의원이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진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의원은 이 대통령에게 친이 소장파들이 개혁을 주장할 경우, 이를 일부 받아들이고 4대강 사업과 개헌 등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받아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과 이 의원은 전당대회 전 청와대 일부 참모를 경질한 뒤 재·보선이 끝난 이후 장관 5~6명을 교체하는 ‘단계적 쇄신론’을 유력하게 검토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장파들의 ‘반란’은 의외로 거셌다. 지난 6월 10일 초선 의원 50명은 청와대의 조속한 쇄신과 4대강 사업에 대한 여론 수렴 등이 담긴 ‘연판장’을 작성해 공개했다. 그 전날엔 청와대 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모두 청와대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청와대 몇몇 참모들과 여권 핵심 관계자들은 ‘배신행위’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청와대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밑에서 흔들면 어떻게 하느냐. 당과 청의 소통을 주장하는 그들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면서 “소장파에게 떠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하는 쇄신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 대통령과 이 의원 쪽에서도 초선 의원들의 움직임에 대해 불쾌해하는 기류가 감지된다. 앞서의 이 의원 측근 의원은 “솔직히 초선 의원들이 왜 그러겠느냐. 이번 지방선거를 보고 다음 총선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면서 “이 의원은 더 이상 금배지에 미련이 없다. 동생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기 바랄 뿐이다. 앞으로 2년이나 임기가 남았는데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좀 더 강하게 나갈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윤 정치연구소’의 윤호석 소장 역시 “여권 이너서클에선 이번 사태를 정권 초 핵심에서 밀려났던 친이 비주류가 주류를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득 의원 라인과 소장파들 사이에 ‘2차전’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결국 이 대통령 선택이 중요한데 당연히 이 의원 손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초선 의원들이 내세우는 전면 쇄신을 하지 않고, 당분간 숨고르기를 하며 이 의원이 진압하기를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지방선거 후 이 의원이 부각될 기미가 보이던 시점에 소장파들의 대대적인 공세가 이뤄진 것을 놓고 양측의 ‘리턴매치’가 시작됐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최근 이 의원의 측근인 이병석 의원의 사무총장 내정 움직임에 대해 소장파들이 크게 반발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의원이 ‘전면’에 등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수도권의 한 친이 의원은 “쇄신 대상으로 물러났던 이 의원이 쇄신의 주체로 등장한다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권 핵심부의 고민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의원이 ‘해결사’가 돼준다면 좋겠지만 ‘형님 정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장파들과의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각종 구설이 끊이지 않았던 이 의원의 몇몇 측근들을 바라보는 사정기관들의 움직임이 최근 들어 더욱 날카로워졌다는 것 역시 부담일 듯하다. 또한 일 년여 동안 권력 핵심에서 멀어져 있던 이 의원의 힘이 예전만 못해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비관론도 들린다.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들로 인해 이 의원이 직접 나서지 않고 ‘막후’에서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임태희 노동부 장관의 대표 출마설을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 장관은 이 의원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사다. 장관직 역시 이 의원이 적극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월 중순 치러질 것으로 예정돼 있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그동안 임 장관은 주자로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선거가 끝난 이후 세대교체 바람이 일면서 조금씩 임 장관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임 장관은 지난 9일 기자들이 대표 출마 가능성에 대해 묻자 “나도 정치인인데 왜 생각이 없겠느냐. 여러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답하기도 했다. 청와대 역시 임 장관이라면 적극 지지하겠다는 기류여서 임 장관의 거취가 향후 여권 권력구도에 중대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인 현 정권 고위관료는 “임 장관에 대한 이 대통령 신임은 남다르다. (임 장관의 당 대표 출마는) 곧 ‘이 의원의 복귀’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라면서 “이 의원은 친이계 중 그나마 박근혜 전 대표와도 사이가 좋은 편이기 때문에 계파 간 갈등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