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월드컵에서 ‘원정 16강’을 달성하고 돌아온 태극전사들. 비록 8강 길목에서 넘어졌지만 우리는 이들을 통해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봤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선수들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제 기량을 맘껏 뽐낸 ‘젊은 피’들 때문이다. 월드컵 무대에 오른 이들은 ‘즐겁게 하는 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일요신문>은 ‘스스로 하는 축구, 즐겁게 하는 축구’를 가르치는 용인시축구센터를 찾아가 미래의 월드컵 스타 8인방을 만나봤다. 2010남아공월드컵, 한국 축구의 미래에 대한 축구 꿈나무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 ‘떠오르는 샛별’ 8인방과의 유쾌한 대화를 공개한다.
“한국 축구는 강해요. 앞으로 더욱 강해질 거예요.”
쑥스러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축구 꿈나무들은 ‘월드컵’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 아쉬웠던 장면 등 월드컵에 관한 질문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머릿속으로 수없이 리플레이시켰기 때문이리라.
신갈고 공격수(FW) 김영승은 가장 아쉬웠던 장면으로,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허용한 수아레스의 2번째 골을 꼽았다. 한국의 8강 진출을 가로막은 수아레스의 역전골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고. 김영승은 춘계 한국고등학교 축구연맹전 지역리그 득점 랭킹 1위에 오른 유망주. 순간 스피드가 좋아 공간 창출 능력이 수준급이고, 골 결정력도 뛰어나 차세대 멀티 플레이어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U-16, U-17 대표팀에 발탁돼 세계무대를 이미 경험한 바 있다. 특히 U-17 FIFA 월드컵 8강전에서 만난 나이지리아 선수들을 잊을 수가 없단다. “몸 자체가 우리와 달랐다. 근육을 타고 났더라. 개인기도 화려했다.” 당시 U-17 대표팀은 나이지리아에 1 대 3으로 패하며 4강 좌절의 쓴 잔을 마셨다. 그래서일까. 그는 나이지리아전에서 박주영이 보여준 프리킥 골을 이번 남아공월드컵 명장면으로 꼽았다. 원정 16강 진출을 이끈 박주영의 역전골은 그에게 통쾌한 기쁨을 선사했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김영승은 “아버지께서 내가 ‘형보다 덜 순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축구를 시켰다”며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주위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근성과 체력이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겸손함도 갖췄다. 찬스에 강한 공격수, 수비 가담이 가능한 체력과 기술을 갖춘 공격수가 되고 싶다고. 그래서 틈틈이 경기녹화영상을 보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빠짐없이 체크한단다. 축구를 향한 그의 열정 속에서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백암고 공격수 김대광 역시 한국 축구의 유망주다. 현재 지역리그 득점 랭킹 2위에 올라있는 그는 U-16 대표팀 미드필더로 선발돼 세계무대 경험도 했다. 지난 2008년에는 대한축구협회 우수 선수로 선발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1년간 선진축구를 습득한 바 있다. 김대광은 “세계 각지에서 모인 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뛰었다. 낯선 환경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팀에 어떻게 적응해나가야 하는지를 배웠다”며 지난 1년을 회상했다. 각국의 차세대 유망주들과 함께 뛰면서 수준 차이를 느껴 좌절감을 느낀 적도 있었단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자신을 갈고 닦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고. 그래서일까. 이번 월드컵 무대에서 쟁쟁한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태극전사들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그는 그리스전 박지성의 천금 같은 쐐기골을 남아공월드컵 명장면으로 꼽았다. 골문 앞까지 무려 27m(FIFA 발표 30야드)를 질주한 그의 폭발적인 드리블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단다. 아쉬웠던 장면으론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이동국이 슈팅 찬스를 놓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골만 들어갔더라면 상황은 반전됐을 것이라고.
▲ 6월 30일 용인시축구센터에서 축구꿈나무들이 남아공월드컵의 인상적인 점과 아쉬운 점에 대해 저마다 감상을 밝혔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원삼중 공격수 김진수도 16강전 이동국의 슛 장면이 가장 아쉬웠다며 입을 열었다. 같은 포지션을 맡고 있기 때문일까. 공격수가 중요한 찬스를 놓치는 순간엔 본인 역시 가슴을 졸이게 된다고. 인터뷰 시작부터 하얀 붕대로 감긴 그의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경기 중 부상을 입어 인대가 파열됐다고 한다. 많이 다쳤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연습 중에 흔히 있는 일이다. 별 거 아니다”며 미소를 보였다.
김진수는 어릴 때부터 형(현재 신갈고 골키퍼로 활약 중)과 함께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래에 비해 힘이 좋고, 기술은 물론 득점력까지 갖춰 U-12 대표팀에 발탁돼 태극마크를 달았다. 현재 중등부 지역리그 득점 랭킹 1위에 올라있는 ‘떠오르는 샛별’이다. 그는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그리스전에서 이정수가 기록한 첫 골을 꼽았다.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기록한 첫 골이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왼발잡이인 그는 “양발을 자유롭게 구사해 팀을 위해 헌신하는 공격수가 되고 싶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백암중 공격수 김윤서도 주목받는 차세대 스트라이커다. 2009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유소년 축구클럽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2009년 열렸던 MBC 꿈나무축구 윈터리그 챔피언십 득점왕에 이어 아카데미리그(AL) 정규리그에서도 15골을 터뜨리며 ‘2개 대회 연속 최다득점상’을 거머쥐었다. 지난해까지 부산아이파크 유소년팀에 소속돼 있다가 올해 1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용인시축구센터로 둥지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 온 뒤로 재미있는 축구,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축구를 할 수 있게 돼 너무 즐겁다”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가 꼽은 남아공월드컵 최고의 장면은 나이지리아전 박주영의 프리킥 골이었다. 박주영의 볼 다루는 감각을 배우고 싶다고. 그는 “체력과 순발력을 키우고 싶다. 팀 기여도가 높은 선수, 열심히 뛰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당차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김윤서와 함께 백암중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김정환도 U-12 대표팀에 발탁돼 그라운드를 누볐다. 빠른 스피드, 드리블 능력이 일품이다. 체구는 작지만 골 결정력이 있어 중요한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특기 적성 시간에 감독님 추천으로 축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그는 하프라인부터 단독 드리블로 상대 선수들을 제치고 골을 성공시키며 차세대 공격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가 꼽은 남아공월드컵 명장면은 아르헨티나전에서 이청용이 보여준 추격골이었다. 상대 수비의 골을 가로챈 그의 순발력이 인상적이었단다. 반면 가장 안타까운 장면으론 박주영의 자책골을 꼽았다.
차기 대표팀 ‘수비의 핵’으로 떠오를 두 선수는 남아공월드컵을 어떻게 지켜봤을까.
신갈고 수비수(DF) 김영찬은 “수비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공격력이 워낙 막강하다보니 수비가 상대적으로 약했단 평가를 받는 것이다”며 대표팀 수비수들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특히 이정수의 골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단다. 수비면 수비, 공격이면 공격, 이정수야말로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본인도 이정수처럼 ‘골 넣는 수비수’가 되고 싶다고. 중학교 1학년 때,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포지션을 전환한 그는 188㎝의 큰 키를 자랑한다. 제공권 다툼에선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2학년 주장으로서 듬직한 맏형 역할까지 해낸다. 그는 아쉬웠던 장면으로 박주영의 자책골을 꼽았다. 이유인즉슨, 아르헨티나전이 열리기 전 날 경기에서 본인이 자책골을 기록했었다는 것. 울고 싶었던,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는 순간이었단다. “자책골을 기록한 박주영 선수의 심경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바로 본인일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백암고 수비수 박지홍은 이번 남아공월드컵에서 조용형의 활약이 저평가 돼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상대 공격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큰 실수 없이 대표팀의 골문 앞을 굳게 지켰다는 것. 초등학교 5학년 때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할 당시 그는 공격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대 선수의 공을 뺐고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수비수의 역할에 매력을 느껴 포지션을 전환했다고. 그는 백암고 3학년 주장을 맡고 있다. 말 안 듣는 후배가 있으면 호되게 야단도 친단다. 탁월한 위치 선정으로 공중볼 경합에서 져본 적이 없는 차세대 유망주다. 그는 우루과이전에서 골대 맞고 나온 박주영의 프리킥 슛을 가장 아쉬웠던 장면으로 꼽았다.
대표팀 차기 골키퍼로 꼽히는 원삼중 이동건은 가장 아쉬웠던 장면으로 우루과이전 첫 번째 실점 순간을 꼽았다. 상대팀 공격수를 놓친 수비수 잘못도 있지만 정성룡 골키퍼의 순간 판단력이 다소 아쉬웠다는 것. 그러나 “월드컵 첫 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위력적인 슛을 선방한 정성룡 선수의 기술을 본받고 싶다”며 미소를 지었다. 2002년 4강 신화를 이룩한 태극전사들을 보면서 ‘나도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이동건. 단 한 번의 실수가 골로 연결되는 수문장 역할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자신의 큰 키와 점프력을 더욱 가다듬어 한국을 대표하는 골키퍼가 되고 싶다고 밝힌다. 그는 그리스전 박지성의 쐐기골을 가장 위력적인 슛으로 꼽으며 “골키퍼가 어찌할 수 없는 완벽한 슛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축구 유망주들은 한국 축구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들은 ‘한국 축구는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라며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조건을 하나 달았다. 선수들이 ‘스스로 하는 축구, 즐겁게 하는 축구’를 몸에 익혀야 한다는 것. 이들은 용인시축구센터에서 2시간 반의 연습 외엔 각자 자유롭게 운동하는 시간을 갖는다. 비디오 분석, 체력 훈련 등 각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고. 그들에게 강요하는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선수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축구를 위해 알차게 사용하고 있단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하는 축구’를 몸에 익힌 것이다. 이러니 축구가 즐겁고 재미날 수밖에.
축구 꿈나무들이 제시한 ‘스스로 하는 축구, 즐겁게 하는 축구’야말로 한국 축구 성공의 키워드가 아닐까.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
▲ 송영대 총감독. |
이승렬 김보경도 이곳서 ‘쑥쑥’
용인시축구센터는 인근 백암중학교, 원삼중학교, 백암고등학교, 신갈고등학교 축구부 학생들(총 167명)로 구성된 국내 최고의 유소년축구사관학교다. 허정무 감독은 이곳에서 2001년~2004년 12월까지 총감독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왔다. 남아공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된 ‘젊은 피’ 이승렬과 김보경이 바로 이곳에서 허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또한 센터 내부의 많은 선수들이 매년 U-13, 15, 17, 20 등 연령별 대표에 끊임없이 선발되고 있다.
용인시축구센터는 천연잔디구장 2개, 인조잔디구장 3개, 미니 돔구장까지 갖춘 최첨단 시설을 자랑한다. 담당 물리치료사가 상시 대기하고 있음은 물론, 전현직 유소년 축구국가대표 지도자 및 외국 유명코치를 영입해 유능한 축구 인재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양사 역시 따로 있어 선수들에게 풍족한 식사를 제공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선수들은 각 학교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센터로 와 식사를 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가 나머지 수업을 받는다. 송영대 총감독은 “운동하는 아이들에게 음식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실제로 센터에 온 뒤 몰라보게 키가 자라나는 선수들이 많다”며 웃음을 지었다.
2시간 반의 정규 연습 시간 외엔 선수 각자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선수들은 이 시간에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 졸업 전엔 담당 매니지먼트와 카운슬링을 통해 대학 진학, 프로팀, 해외 진출 등을 결정한다. 2001년 센터 건립 이래로 25명의 선수가 K리그로 진출했고, 석현준(네덜란드 아약스), 김성현·임향기(아르헨티나), 신인섭(호주 애들레이드) 등 7명의 선수가 해외로 진출한 바 있다. 스페인, 일본, 호주 등 유명 리그팀과 협력해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어릴 때부터 세계 각국의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 송영대 총감독은 “중·고등학교 때의 무리한 체력 훈련은 선수들의 무릎을 망가뜨릴 수 있다. 우리는 선수들의 몸 건강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따라서 무리한 훈련을 강요하지 않는다. 스스로 즐겁게 뛰는 축구를 추구한다”며 센터 운영 노하우를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