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쯤되면 ‘닭 전문가’ 2008년 12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강원도 춘천에 있는 한 농가에서 한가로이 닭모이를 주고 있다. 연합뉴스 |
‘잠시 쉬다가 말겠지’ 하던 세간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학규는 참 오랜만에 돌아온다. 과연 무엇이 그를 그토록 짧지 않은 칩거로 내몰았을까. 또 돌아오는 손학규는 이전의 손학규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의문의 해답을 짐작이라도 해 보려면 지난 2년간 그의 춘천 생활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말 그대로 칩거였다. 측근들의 전언에 따르면 춘천에서 그의 일과는 대룡산 등산과 닭 키우기, 책 읽기, 생각하기, 찾아오는 사람 만나기 등으로 단순했다. 토종닭과 오골계 등 수십 마리에 달하는 닭을 키우느라 그가 ‘닭 전문가’가 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환멸을 느껴서, 또는 당장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긴 칩거에 들어간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긴 호흡으로 보면 칩거 자체가 뼈아픈 좌절을 맛 본 그의 전략적 선택이자 장기 대권 플랜의 시작이라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그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무위(無爲)의 정치’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손학규의 무위 정치 2년을 관통하는 2개의 키워드는 ‘참회’와 ‘헌신’이다. 틀어박혀 있는 것만으로 부족했는지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상의 시선을 차단했다. 인터뷰를 하러 춘천까지 찾아갔던 기자들 중 허탕을 치고 돌아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아니, 인터뷰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심지어 기자가 와 있다는 얘기를 듣고 피신하기도 했다.
측근들을 통해 멀찍이서 현실정치에 관여하는 ‘원격 정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측근들이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한 그의 생각은커녕 그의 근황을 전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한 배경에는 이 같은 그의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
정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잊혀지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부족함이 없는 ‘참회’의 모습이었다. “2007년 대통령선거, 2008년 국회의원 총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갖겠다”던 그의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손학규는 그러나 칩거를 하다가도 당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엔 어김없이 ‘외출’을 감행했다. 2009년 두 번의 재·보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 뒤에는 손학규가 있었다. 특히 지방선거 당시엔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선 민주당 김진표,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의 단일화를 중재함으로써 무산 위기에 처한 범야권 후보단일화의 물꼬를 텄다.
물론 손학규는 잠깐 동안의 외출 기간에도 언론 인터뷰를 삼가고 자신의 역할이 끝나기가 무섭게 춘천으로 돌아갔다. 철저히, 그리고 의도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손학규는 이처럼 ‘참회’하고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을까. 무엇에 쓰려고 포인트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 왔을까.
아마도 그의 시선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 즉 호남과 진보개혁 진영에 꽂혔을 것 같다. 또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떼는 데도 그가 쌓은 포인트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진보개혁 진영 대권주자가 성공한 검증된 길은 ‘김대중의 길’과 ‘노무현의 길’밖에 없다. 전자는 호남에 뿌리를 둔 진보개혁 주자가 타 지역과 연합한 길이었고, 후자는 비(非)호남의 진보개혁 주자가 호남의 선택을 받은 길이었다.
수도권 출신이라는 선천적 조건을 가진 손학규에게 ‘김대중의 길’은 애초에 허락되지 않은 길이었다. 그렇다고 ‘노무현의 길’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후천적 결함까지 지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을 거치며 단지 당적변경과 대중적 인기만으로는 전통적 지지층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또 호남 출신에게 만연한 ‘유시민 비토’ 분위기를 지켜보며 단지 진보개혁만으로는 호남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도 새록새록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손학규가 ‘노무현의 길’을 가기 위해선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을 관중으로 한 씻김굿이 필요했고, 그는 2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참회’와 ‘헌신’의 굿판을 벌여온 셈이다.
손학규는 이제 스스로 굿판을 걷어치우고 정치 일선으로 돌아오려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엔 여유보다는 긴장이 서려 있을 것 같다. 바로 눈앞에 큰 시험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는 지난 2년간 ‘참회’와 ‘헌신’으로 쌓아 온 포인트를 밑천 삼아 ‘캐시백’을 요구하는 손학규에게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 어떤 답을 줄지가 드러나는 장인 것이다.
그들이 이번에도 손을 뿌리치면 손학규는 다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자신의 대권 플랜을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반대로 그들의 선택을 받는다면 고만고만한 당내 경쟁자들을 제쳐두고 본격적인 대권가도로 달려갈 수 있다. 큰 길 위에 진보개혁 진영의 대표주자로 서서 ‘본선 상대’와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과연 손학규는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씻김굿은 효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민주당 전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