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성훈이 4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UFC116 미들급 매치 크리스 리벤과의 경기에서 타격전을 펼치고 있다. AP/연합뉴스 |
아쉬운 역전패였다고?
추성훈 경기는 한국에도 생중계됐다. 이에 몇몇 언론에서는 추성훈이 30초만 버텼으면 승리(판정승)를 따낼 수 있는 상황인데 아쉽게 역전패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UFC경기는 5분 3라운드. 단 타이틀매치는 5라운드). 팔이 안으로 굽는 까닭에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1라운드에서 추성훈이 타격을 앞세워 선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2라운드에서 확실하게 밀렸고, 3라운드에서도 테이크다운 이외에는 포인트를 따지 못했다. 심지어 테이크다운에 이어 가드포지션, 마운트포지션 등 유리한 자세를 점하고도 심각한 체력저하로 오히려 리벤에게 주로 공격을 당했다(시쳇말로 위에 올라앉아 얻어맞은 꼴).
리벤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추성훈의) 체력저하가 확실히 느껴졌다. 상대가 쉬면서 판정으로 몰고가기 위해 테이크다운에 이어 그라운드싸움을 원한다는 걸 알아챘다.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추성훈은 (나를) 붙잡고 쉬려고만 했다. 이에 서브미션으로 승부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트라이앵글 초크가 제대로 먹혔다”고 말했다.
추성훈 열세는 경기 후 공개된 심판 채점표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났다(사진 참조). UFC는 비교적 공정한 판정으로 유명한데 넬슨 해밀턴, 세실 피플스, 패트리샤 자먼 등 3명의 부심은 1라운드는 10-9로 추성훈의 우세, 그리고 2라운드는 거꾸로 9-10으로 리벤의 우세로 채점했다.
또 실제 경기장 분위기도 2라운드 이후 추성훈의 체력저하가 확연하게 드러나며 당초 추성훈을 응원하던 목소리가 잦아든 대신 리벤을 연호하는 소리가 커졌다, 중계화면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추성훈은 연신 가쁜 숨을 토해내느라 3라운드 시작이 조금 늦춰질 정도로 체력이 뚝 떨어져 있었다. 충격적인 추성훈의 완패였고, 또 그 원인은 철저하게 ‘저질 체력’에 있었다. 그리고 경기 전 리벤을 혹평하면서 ‘약한 상대와 싸울지 말지’를 고민까지 했던 그였기에 더욱 체면을 구긴 것이다.
추성훈의 파이팅 화끈?
이날 추성훈-리벤의 경기는 바로 다음에 열린 브록 레스너-셰인 카윈의 헤비급타이틀매치와 함께 UFC 116의 공동 메인이벤트였다. 일단 미국 팬들에게는 훨씬 무게감이 떨어지는 추성훈 경기가 브록 레스너급으로 배정된 것 자체가 유난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추성훈의 경기는 UFC 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레스너의 역전승을 제치고 ‘오늘의 경기’에 선정됐다. 이 덕에 추성훈은 패배했지만 오늘의 경기 보너스 7만 5000달러를 받아 대전료(4만 5000달러)와 함께 총 12만 달러(한화 약 1억 4400만 원)를 챙길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앨런 벨처를 상대로 힘겨운 판정승(2-1)을 거둔 데뷔전도 다른 화끈한 KO경기를 제치고 당시 ‘오늘의 경기’에 선정됐다는 사실이다. 이에 팬들은 물론 한국의 주요언론까지 “졌지만 오늘의 경기에 두 번이나 뽑히면서 화끈한 걸 좋아하는 미국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추성훈의 UFC 진출 과정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추성훈은 IB스포츠를 통해 UFC로 진출했고, 또 UFC와의 계약 직후 IB스포츠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UFC는 파이트머니를 즉시 공개하는 등 대전료 지급이 투명하다. 아무리 추성훈이 한국과 일본에서 지명도가 높다고 해도 UFC는 한 경기에 수억 원에 달하던 추성훈의 일본 파이트머니를 맞춰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시아 시장 확대에 중요한 마당에 방송 중계권자인 IB스포츠의 요구와 ‘괜찮은 상품’인 추성훈을 놓치기도 싫었다. 이에 IB스포츠가 매니지먼트 계약을 금액으로 보전하고, 또 UFC는 어떤 식(오늘의 경기)으로든 대전료 외의 합법적인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제외하면 추성훈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 사진출처=UFC 공식 홈페이지 |
추성훈은 이날도 선수입장 때 일본 시절 사용했던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틀었다. 그리고 양쪽 어깨 및 트렁크 양옆에 새겨진 태극기와 일장기를 한 번씩 툭 치고, 심지어 입장 때 세컨까지 모두 절을 하는 특유의 세리머니도 모두 같았다.
이런 추성훈식 선수 입장은 한국과 일본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뭉클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많이 어색했다. 미국 관중은 신기해서 쳐다보기는 했지만 실소를 터뜨리는 사람도 많았다. 강한 비트의 음악이 주를 이루는 미국에서 ‘타임 투 세이 굿바이’는 마치 노래방에서 한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발라드를 부르는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분위기는 물론 추성훈은 옥타곤 적응에도 실패했다. 기본적으로 UFC는 강한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푸른눈의 한국파이터’ 데니스 강도 급격한 체력저하로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이다 퇴출당했다. UFC 4연승을 구가중인 김동현은 “일본 대회에서는 못느꼈는데 이상하게 UFC에서는 체력이 부담이 됐다. 2차전인 맷 브라운전에서 가까스로 승리하고 난 뒤 체력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 운동했다”고 밝혔다. 김동현은 라스베이거스 대회에 출전할 때는 거의 한 달 가까이 현지에서 전지훈련을 할 정도로 ‘UFC 체력’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추성훈이 주로 막판까지도 일본에서 훈련하고, 전지훈련도 일본인들이 많은 하와이에서 1주일가량 머물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 취재진에 따르면 “이제 일본 격투기계에서도 최고참급에 속하는 추성훈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킬 트레이너를 찾기 힘들다”는 것도 고민이다.
어쨌든 같은 아시아계나, 브라질 선수 위주였던 일본 격투기 대회에 비해 UFC는 체격과 체력이 훨씬 뛰어나다. 추성훈은 이에 대한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고, 이것이 1차전 고전, 2차전 충격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이날 추성훈과 마찬가지로 1년 만에 UFC에 컴백했지만 엄청난 체력과 파워를 바탕으로 화제의 역전승을 일궈낸 브록 레스너와는 대조적인 것이다.
리벤으로부터 제법 데미지를 입은 추성훈은 이날 경기 후 병원으로 이동, 정밀진찰을 받았다. 데뷔전 때처럼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 측으로부터 ‘격렬한 경기로 인해 오는 8월 18일까지는 경기를 치를 수 없고, 8월 3일 안에 어떤 계약도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추성훈은 흥행 파괴력이 큰 반더레이 실바와의 대결을 원해 왔지만 이제 명분을 잃었다. 오히려 추성훈 덕에 스타가 된 리벤이 실바와 붙여달라고 큰소리 치고 있다. UFC는 보통 4경기 단위로 계약을 한다. 하지만 경기력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칠 경우는 중간에 파기하기도 한다. 추성훈의 경우, 한 번 졌지만 아직 흥행력이 있는 까닭에 향후 1~2번 더 UFC가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전처럼 빅카드로 활용하기에는 부담이 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도 다시 1, 2차전과 비슷한 실망스런 결과가 나온다면 추성훈 카드를 과감하게 버릴 수도 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김동현, 그리고 새로 계약한 양동이 등 아시아존 선수들의 영입을 늘리고 있기에 추성훈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