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정동영 상임고문과 정세균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제가 주장하는 담대한 진보란 한마디로 말해서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할 것이 아니라 역동적 복지국가의 방향으로 확실하게 좌회전하자는 것입니다. 담대한 진보는 2007년 (대통령선거) 패배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 꿰뚫어보지 못했습니다. 2008년 9월 세계의 경제질서를 지배해온 월가가 저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또 이렇게도 썼다. “복지를 위한 진보, 그것이 담대한 진보이며 민주당은 복지당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과제는 4대 서민정책입니다. 850만 비정규직, 300만 소기업 영세자영업자, 200만 차상위계층, 100만 청년실업자를 위한 정책이 그것입니다.”
이를 한 야당 유력 정치인의 정책비전으로 국한해서 읽는다면 절반만 이해한 것일 수 있다. 지난 2월 10일 민주당 복당 이후 정 의원의 행보는 줄곧 민주당 안팎의 시선을 집중시켜 왔기 때문이다. 8월 말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 출마 여부를 놓고 갖가지 추측을 낳았던 그다. 그리 길지 않지만 정 의원은 이 글을 통해 자신의 향후 선택이 어떠할지, 또 험난한 싸움을 위해 새롭게 준비한 무기가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내 보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중도’와 ‘실용’이라는 꼬리표를 뗀 선명한 진보 노선을 기치로 걸고 당권에 도전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정치인 정동영’이 그간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승부수를 던져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만드는 행보를 보여 왔다는 점에서 그의 당권 도전은 그리 놀라운 선택은 아니다. 지난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면전에서 권노갑 씨를 비판하며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의 깃발을 든 것도, 200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신당 창당을 통해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의 경선 구도를 만든 것도, 2009년 4·29 재·보궐선거 당시 민주당의 공천배제에 반발해 탈당을 감행한 뒤 ‘무소속 연대’를 꾸려 살아 돌아온 것도 모두 ‘승부사 정동영’의 면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실 정치적 경쟁자는 물론 주변 인사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권 도전과 관련해 “이번만큼은 참아야 한다”며 정 의원을 만류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동영계로 분류되는 한 민주당 의원은 “측근 인사들 중에서도 이번 전대 출마에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대선후보를 지낸 사람이 금배지를 달기 위해 탈당까지 감행한 게 전통적 지지층에겐 큰 충격이었고, 이 때문에 정 의원은 당분간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과거 정동영계로 분류됐던 의원들 중 과연 몇 명이나 끌어 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까지 말했다.
이 같은 부정적 기류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이 또 다시 승부수를 던지는 이유는 뭘까. “선거라는 선거는 다 나간다”는 조롱 섞인 반응을 무시할 만큼 그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뭘까. 아마도 그 해답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가 느끼는 위기감에 있는 듯하다.
실제로 정 의원은 과거에도 좀처럼 공백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지난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열린우리당 당의장에서 물러난 뒤 독일로 향했을 때도 불과 두달여 만에 돌아왔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한 뒤에도 그는 미국 듀크대와 중국 칭화(淸華)대에서 6개월씩 머물며 정치적 휴지기를 갖겠다며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8개월여 만에 돌아왔다. 중국에는 가지도 못했다.
2009년 3월 22일 귀국한 뒤 겪은 험난한 정치역정도 그의 위기감을 부채질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고향인 전주 덕진 재선거를 통해 재기하겠다는 뜻을 품고 왔지만 민주당은 개혁공천을 이유로 그를 내쳤다. 결국 탈당해 무소속으로 당선됐지만 이후 복당까지는 10개월이 걸렸고, 전주 덕진 지역위원장을 차지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3개월이 더 걸렸다.
▲ 지난 15일 서울 연신내역 4거리에서 가진 민주당 재보궐선거 대책본부출정식에서 전당대회 맞대결 상대로 거론되는 손학규 상임고문, 정세균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대권주자 정동영에게 당권 도전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지만 이번에도 그의 승부수가 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더 많다. 그가 느끼는 위기감만큼이나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당내 비주류 그룹에서 대표주자로 인정받는 게 급선무다. 지금은 쇄신연대라는 한 배를 타고 있지만 박주선 최고위원은 물론 천정배, 추미애 의원도 모두 그의 경쟁자다.
보다 근본적으로 정 의원은 자신을 ‘추락한 비행기’로 보는 시선을 넘어서야 한다. 한 번 높이 떠올랐다 추락한 비행기는 아직 이륙하지도 않은 비행기보다 더 절망적일 수 있다. 실제로 정 의원은 최근 민주당 대의원들을 상대로 한 차기 당대표 선호도 조사에서 번번이 손학규 전 대표와 정세균 대표에 밀리고 있다. 자신의 텃밭이랄 수 있는 호남에서도 정 대표와 박주선 최고위원에 밀린다.
‘개혁의 기수’에서 ‘중도실용파의 수장’으로, 이제 다시 ‘선명한 진보 주창자’로 모습을 바꾸는 데 대한 거부감 역시 정 의원이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다.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니 도무지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는 비판은 단지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민주당 주류의 입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승률 높은 승부사였던 정 의원에게 이번 전대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힘든 싸움이 될 공산이 큰 셈이다. 1등을 하거나 그와 별 차이 없는 2등을 해야 본전이요, 3등을 했다간 치명타가 될 수 있다. 그가 이번에도 극적인 반전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승부사 정동영’의 돌파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주목된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