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청와대회동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
“박전 대표와 한 번 만나야 될 텐데….” 이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 통과가 국회에서 힘들 것으로 예상되던 지난 5월 중순부터 측근들에게 여러 차례 이런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세종시 정국을 겪으면서 박 전 대표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협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6·2 지방선거 참패 후엔 보다 구체적인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선거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한나라당 계파 간 분열이 꼽히던 시점이었다. 청와대는 박형준 당시 정무수석 주도하에 박 전 대표와의 회동을 검토했고 친박 측에도 그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또한 주호영 특임장관도 여권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이 대통령-박 전 대표 회동을 물밑에서 추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과의 만남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대표 측근으로 꼽히는 한 친박계 의원의 보좌관은 “지방선거 패배 후에 박 전 대표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이벤트성’ 아니냐. 박 전 대표는 보여주기 위한 회동을 원하지 않는다. 또 선거와는 일정 거리를 뒀던 박 전 대표가 자칫 패배에 대한 책임론에 휩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여기에 총리실 민간인 사찰 의혹, 선진국민연대 인사 전횡 등이 불거지면서 청와대는 박 전 대표와의 회동을 잠시 접었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부터 꺼야 했기 때문. 여권 핵심부 내에서는 7월 14일 전당대회 이후 회동을 본격 추진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집권 후반기 박 전 대표와의 ‘소통’을 강화하고자 했던 이 대통령 의지는 인사에서도 잘 나타났다. 친박 인사들과 비교적 말이 잘 통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임태희 전 고용노동부 장관을 비서실장, 정진석 의원을 정무수석으로 발탁한 것.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남은 임기 동안 이명박 정부 코드는 서민과 소통이다. 그동안 대립각을 세워왔던 박 전 대표와 만나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소통의) 완결판이 될 것”이라면서 “임 실장이나 정 수석의 경우에도 친박의 거부감이 덜하다는 점이 고려됐다”고 귀띔했다. 특히 정치권 ‘마당발’로 통하는 정 수석은 “차기는 박근혜로 가는 게 순리”라고 얘기할 정도로 친박계와 정서적으로 가깝다. 박 전 대표 동생인 박지만 씨와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정치권에서 정 수석 임명을 대표적인 ‘소통인사’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상수 대표가 취임하자마자 ‘이명박-박근혜 회동’을 첫 작품으로 추진한 것 역시 이러한 청와대 기류가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또한 이 대통령과의 만남에 다소 회의적이던 박 전 대표가 입장을 바꿀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도 안 대표가 적극 나서게 된 배경으로 풀이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친박 중진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개입을 외면했다. 결국 한 석의 최고위원(서병수)을 획득하는 데 그치자 친박계 내에서는 ‘교통정리’를 하지 않았던 박 전 대표를 향한 ‘원성’이 확산됐다. 순도 높은 로열티를 자랑하는 친박계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싫든 좋든 이명박 정부의 공과를 짊어지고 차기 경쟁에 나서야 할 박 전 대표로서는 무조건 반기를 드는 소수파 수장이란 인식을 불식시켜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그 어느 때보다 회동의 성사 가능성이 무르익자 안 대표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7월 16일엔 박 전 대표로부터 “대통령과의 회동을 거절한 적이 없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상의 승낙을 얻어냈고, 다음 날엔 이 대통령을 만나 “언제든지 좋다. 국정현안에 대해 기탄없이 대화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안 대표는 이 과정을 언론에 공개하며 둘의 만남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포함한 정치권에선 이번 ‘이-박 회동’이 ‘사진 찍고 오는’ 행사 그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오히려 갈등이 악화될 것이란 비관적인 견해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다섯 차례의 회동을 살펴보면 이런 기류가 확산되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대선 직후인 2007년 12월 29일과 2008년 1월 23일 만난 두 사람은 당시 최대 이슈였던 18대 총선 ‘공천’과 관련해 머리를 맞댔지만 결국 친박계는 대거 탈락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공개적으로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분통을 터트린 바 있다. 2008년 5월 10일 3차 회동에서는 박 전 대표가 무소속으로 당선된 친박 낙천자들의 복당 문제를 꺼냈는데 당시 이 대통령이 “당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냉랭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2009년 1월 말엔 두 사람이 청와대에서 비밀리에 만났으나 이후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 박 전 대표가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9월 회동은 “그나마 화기애애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정운찬 총리 임명과 함께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추진으로 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이번 회동 역시 두 사람이 ‘앙금’을 털어내고 손을 잡기엔 걸림돌이 많다. 우선 만나서 논의할 테마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 후반기 최대 이슈인 4대강 사업과 개헌은 박 전 대표와 이 대통령 견해 차가 커 논의 대상에 오르지도 못할 가능성이 크고, 안 대표가 꺼냈던 ‘박 전 대표 총리설’은 박 전 대표의 부인으로 수그러든 상태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우리도 고민이다. 남북문제나 당내계파 화합 등과 같은 일반적인 것들을 얘기하지 않겠느냐. 친박 인사 입각이나 서청원 전 대표 사면 문제도 화제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의원도 “원칙적인 말들만 오갈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초청받아 가는 것이니만큼 주로 듣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친박계에선 벌써부터 회동 자체에 대한 ‘무용론’이 파다하다. 이번 역시 이 대통령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박 전 대표 자문그룹에 몸담고 있는 한 대학교수는 “회동에 대한 구체적인 가닥이 잡히기도 전에 언론에 흘린 것만 봐도 그렇다. 박 전 대표를 재보선에 이용하겠다는 것 아니겠느냐. 그동안 뒤통수를 너무 많이 맞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박 전 대표가 한 ‘만남을 거절한 적이 없다’는 말의 뉘앙스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굳이 먼저 만나겠다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관계 개선은 전적으로 이 대통령이 얼마나 허심탄회하게 박 전 대표를 대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7월 21일 몇몇 친박 의원들과 서울 모처의 한 음식점에서 만찬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 자리에서도 이번 회동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현 정권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란 강경한 목소리도 나왔다. 친박 인사들을 입각시키는 등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당시 이 만찬 소식을 들은 청와대는 대화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부랴부랴 직원을 급파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세종시 정국에서 박 전 대표 ‘힘’을 체감했던 여권 주류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박 전 대표와의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지만 딱히 ‘아이디어’는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에서 정책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한 인사는 “친박 측과 사전 조율에서 4대강이나 개헌 등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박 전 대표가 관심이 많은 서민정책이나 외교·복지 부문 등에서 ‘꺼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의미 없는 만남으로 전락할 수 있어 꼼꼼하게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물론 친이 내부에서도 ‘삐딱한’ 시선은 감지된다. 이 대통령이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경우 박 전 대표로 권력이 급격히 쏠릴 것이란 걱정이 나오고 있다. 수도권의 한 친이계 재선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와 차기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국정 협조를 부탁할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자세로 임할 필요는 없다.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명박-박근혜’ 회동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는 가운데 여권 일각에서는 좋은 결실을 내기 위해 청와대가 박 전 대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MB 대선캠프 출신의 한 여권 고위 관료는 “밉든 좋든 박 전 대표가 손을 잡아 주면 큰 힘이 되는 게 현실이다. 박 전 대표의 의중대로 세종시 원안에 기업과 대학이 들어가는 ‘플러스알파’를 보장해주는 방안도 생각해볼 만하다. 이 경우 세종시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두 사람에겐 결자해지의 남다른 의미도 있을 것이다. 또한 박 전 대표 측이 원하는 자리에 친박 인사를 입각시키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대신 이 대통령이 애착을 갖고 있는 4대강 사업에서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박 전 대표의 묵시적인 동의 정도를 이끌어내면 된다. 서로 ‘윈-윈’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복수의 친박 인사들은 이에 대해 “(회동은) 박 전 대표가 알아서 할 것”이라며 구체적 언급을 피하면서도 “무조건적인 반대는 ‘발목잡기’로 비쳐질 수 있는 만큼 (합의의) 여지는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