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8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둔 한나라당 내에서 다시 개헌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사진은 국무회의를 마친 뒤 집무실로 향하는 이명박 대통령. |
민주당의 반발 등 논란이 거세지자 안 대표가 ‘속도조절’을 하겠다며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재보선 이후 여건이 달라졌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게다가 개헌의 필요성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권에서 거론되어 온 만큼, 개헌론이 하반기 정가의 주된 이슈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개헌은 ‘5년 단임제’인 현 대통령제를 개편하자는 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에 차기 대권주자들에게도 ‘절대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사안. 그렇다면 여야의 잠룡들은 개헌에 대해 각각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차기 주자들의 개헌에 대한 속내를 들춰봤다.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잊을 만하면 개헌론이 불거지곤 했다. 더구나 대통령의 입에서도 몇 차례 거론된 사안이기에 그때마다 정치권은 한동안 술렁였다. 지난해 9월과 올 2월, 이명박 대통령은 개헌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지난해 9월엔 “영토문제에서부터 이념적 문제까지 손을 댄다면 헌법 개정은 실제로 이뤄지기 힘들다. 행정구역이나 선거구제 개편, 통치 권력이나 권력구조 개편으로 제한하면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라며 ‘제한적 개헌론’을 거론한 바 있고, 지난 2월 취임 2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는 “이제 남은 과제는 선거법을 개혁해야 되고, 행정구역 개편을 한다든가 또 제한적이지만 헌법에 손을 대는 과제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때마다 이 대통령 발언의 ‘속내’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견제가 담겨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던 게 사실이다.
최근 또다시 안상수 대표가 개헌론을 주장하고 나서자, 친박계 서병수 최고위원이 ‘제동’을 건 것도 그동안 이어져온 개헌에 대한 양측 실랑이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서 최고위원은 “정치권에서 개헌이 얘기되고 있지만, 권력구조 개편에 따라 (정치 지도자들의) 유불리가 정해지기 때문에 권력구조를 너무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 의견 수렴을 거쳐야 한다”고 비판했다.
안상수 대표 및 친이계가 주장하는 개헌의 골자는 ‘분권형 대통령제’다. 분권형 대통령제, 즉 이원집정부제는 행정부의 권한이 대통령과 총리에게 나뉘어 있는 형태를 말한다. 대통령은 통일, 외교, 국방 등의 분야를 맡고 총리는 내정에 대한 행정권을 맡아 책임정치를 행하도록 하는 데 유용한 방식이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쏠린 권한이 총리에게 나뉘므로 대통령이 행할 수 있는 통치 분야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정가에는 친이계 내에 박근혜 전 대표에 맞설 만한 확실한 대항마가 없는 상황이라 여권 핵심부가 ‘권력분산형’ 개헌을 추진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적지 않다.
▲ 친박계 윤상현 의원 결혼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표와 은평을 재보선에서 당선된 이재오 전 권익위원장. |
안상수 대표의 개헌론 발언에 대해 당내 일부 친이계에서조차 ‘분위기 파악 못하고 너무 앞서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지자 안 대표는 일단 한 발 물러섰다. 안 대표가 지난 16일과 17일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을 잇달아 만난 뒤 “지금은 개헌 문제를 공론화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만큼, ‘윗선에서 조율이 이뤄진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당분간은 개헌론이 잠잠해질 가능성도 있지만 정치권 전문가들은 “결국 향후 개헌론이 친이계와 친박계 간의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개헌론은 세종시 문제에 이어 하반기 정국의 가장 큰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세종시법으로 골이 깊어진 친이 대 친박 사이의 앙금이 개헌론으로 인해 ‘끝’을 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다시 본격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분당론’에 개헌론이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인 것이다.
한나라당 내 친이계 대표주자인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과 정몽준 전 대표 역시 친이계에서 주장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 찬성 입장을 보여 왔다. 특히 이재오 전 위원장의 경우 7·28 재보선에서 민주당 장상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 만큼 향후 정치활동에 탄력을 받게 됐다. 이 전 위원장은 “지역발전에 전념하겠다”며 ‘중앙정치’ 재개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지만, 정치 전문가들은 “2년이 넘는 ‘정치 공백기’를 메우고 당내 친이 주자로 자리 잡기 위해서라도 이 전 위원장은 향후 친박계와 경쟁하게 될 정치 현안에 대해 적극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 지난 7월 15일 민주당 재보선 대책본부출정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손학규 상임고문, 정세균 대표, 정동영 상임고문(왼쪽부터). |
정몽준 전 대표 역시 지난 2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개헌론’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은 바 있다. 그가 생각하는 로드맵은 ‘연내 개헌 논의→내년 2월 임시국회 처리’. 정 전 대표는 “이미 많은 국회의원과 일반 국민 사이에 개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며 개헌론을 주장했다. 현재의 분위기대로라면 정 전 대표의 생각대로 개헌 논의가 진행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재보선이 끝난 이후 본격적으로 개헌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면 지금은 말을 아끼고 있는 친이계 유력 주자들이 개헌론에 대한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반면 야권 잠룡들의 경우 한나라당 주자들과 개헌론에 대한 온도 차이가 있다. ‘개헌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시기와 절차 등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당 등 야권 주자들 대부분의 입장이다. 우선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개헌에 대해 한나라당이 당론을 내놓는 게 우선이다. 당론도 없이 개헌을 얘기하는 건 정국 전환용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며 “한나라당 내에서도 개헌에 대한 의견이 7인 7색인데 내부 의견부터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치전문가들도 개헌 논의의 시점에 대해선 차기 대선과의 연관성이 적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한 정치분석가는 “18대 국회 하반기로 넘어가면 대선주자가 가시화될 것이므로 각자의 입장에 따라 개헌 논의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 아예 다음 정권으로 넘기든가 아니면 하반기 이전으로 앞당겨야 한다. 개헌은 그 중요성이 큰 만큼 여야 모두 신중하고 냉정한 자세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세균 대표 측은 구체적인 개헌 방식에 대한 입장은 밝히지 않았지만, 민주당 의원들 상당수는 ‘4년 중임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5년 단임제로는 대통령의 실적을 평가할 수 없고 정책의 지속성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흥미로운 점은 ‘4년 중임제’는 박근혜 전 대표가 주장하는 개헌방식이어서 향후 여야가 충돌할 개헌 정국에서 상당수 민주당 의원들이 박 전 대표의 입장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손학규 전 대표 역시 ‘4년 중임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로선 말을 아끼고 있다. 그가 향후 개헌 논의에서 어떤 입장 변화를 보일지도 관건. 손학규 전 대표 측 관계자는 “과거 4년 중임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나 최근엔 개헌에 대한 생각을 밝힌 바가 없다. 지금의 개헌 논의라는 게 정략적으로 제의된 것이기 때문에 손 전 대표는 자신의 생각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편 정동영 상임고문의 경우엔 “권력구조 개편에 앞서 선거구제 개편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 고문 측 관계자는 “독일식 소선거구제로 먼저 선거구제를 개편해야 한다. 득표율만큼 의석을 갖게 해 영남에서 호남 후보가, 호남에서 영남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 고문 역시 개헌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정 고문 측은 “현행 5년 단임제는 남미형 제도로 선진국형은 아니다. 87년 체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개헌은 선거에 임박해서 정치 협상으로 하지 말고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서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의 경우에도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그 방식과 시기에 대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권력구조 방식에 대해서는 ‘강소국 연방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강소국연방제란 단일국가를 연방국으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전국을 여러 권역으로 나누어 국방·외교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지방에 넘겨주는 방식이다. 이회창 대표는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 ‘강소국 연방제’를 선거 공약으로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회창 대표 역시 최근의 개헌론 주장은 다분히 선거와 정국의 분위기 전환을 의식한 것이라는 비판적 입장이다. 시기적으로도 이번 18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논의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한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불과 2년여 정도 남았는데 그동안 공론화와 설득이 가능하겠느냐”며 “헌법을 고치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하고 또 헌법을 고칠 바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조금 바꾸기보단 미래 국가구조를 위한 개헌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자유선진당 측은 “개헌이 이명박 대통령 임기와 관계없이 오랜 논란과 연구 끝에 진행되고, ‘강소국 연방제’를 포함한 논의가 이뤄진다는 전제가 있다면 언제든 개헌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차기 대권주자들 사이에서도 개헌에 대한 시각과 입장은 저마다 다르다.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개헌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이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 모두 각자의 상황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기에 그 방식과 시기에 대한 의견 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연 향후 개헌이 유력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를 떠나 국민의 미래를 위해 실행될 수 있을지 눈여겨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소신이냐 정략이냐
국회의원들은 개헌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여야 의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개헌에는 찬성하고 있다. 세부 방식에 대해선 ‘개별 의견’을 내놓기 조심스러워 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4년 중임제’로 바꾸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나라당 내에서는 개인의 의견보다 친이계인지, 친박계인지에 따른 정치적 판단이 앞서고 있는 듯해 다소 씁쓸한 감이 든다.
지난해 초 실시된 한 언론사의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개헌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18대 의원들을 대상으로 ‘개헌’에 대해 묻는 질문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찬성 의견은 89.1%, 반대 의견은 10.9%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4년 중임제’는 68.2%, ‘의원내각제’가 13.4%, ‘이원집정부제’ 9.5%, ‘정·부통령제’ 4.5% 등의 순이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친이계 의원들이 대부분인 수도권에서 ‘4년 중임제’에 대한 지지율이 76.0%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는 점. 이들이 과연 향후 전개될 개헌 논의 과정에서 ‘4년 중임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해 어떤 의견을 내놓을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또한 민주당 내에서도 ‘4년 중임제’에 대한 지지가 68.0%로 가장 높아 한나라당 내에서 친이-친박계가 갈등할 경우 민주당 의원들의 의견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 정치 분석가는 “개헌론이 공론화될 경우 세종시 찬반 논의와 같이 개헌 방식에 대한 찬반에 따라 친이계와 친박계가 극명하게 대립할 것이다. 친이계가 민주당 등 야권에서도 지지가 높은 4년 중임제 대신 분권형 대통령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거센 마찰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