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을 때 산부인과 간호사들을 경악시켰다는 그녀의 미모는 1980년대 미인의 기준이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던 미인이자 귀족가의 일원이었으며 훤칠한 테니스 선수인 프랜시스 쉴즈와 결혼해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갔다. 대대로 장신의 미남 미녀 집안에서 태어난 브룩 쉴즈에게 아름다움은 숙명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신은 가끔씩 불공평한 것인지 쉴즈에겐 뛰어난 머리도 선사했고, 그녀는 백치미가 아닌 지성미로 어필하는 영예(?)까지 얻게 된다.
브룩 쉴즈의 연예계 생활은 돌이 되기도 전에 시작했다. 비누 CF 모델이 첫 무대였고, 이후 CF계의 아역 스타가 되었다. 이후 한두 편의 영화에서 경험을 쌓긴 했지만 ‘배우 브룩 쉴즈’의 경력이 시작된 작품은 루이 말 감독의 <프리티 베이비>(1978)였다. 틴에이저가 되기도 전에 올 누드 신을 불사한 브룩 쉴즈는 어린 창녀 바이올렛 역을 맡았는데 <프리티 베이비>는 그녀의 본격적인 데뷔작이자 최고작이다.
1917년의 뉴올리언스의 매춘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창녀의 딸로 등장하는 12세의 브룩 쉴즈는 어둡고 다소 음침한 이야기를 밝게 만드는 주인공이다.
매춘굴에서 태어나 결국 자신도 몸 파는 여자가 되지만 어린 바이올렛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긍정적이다(한편 엄마 역의 수잔 서랜든은 누드 신에서 쉴즈가 완전히 나체가 되는 것을 반대해 지-스트링(G-String, 끈 팬티)을 입혔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브룩 쉴즈가 보여준 영민한 연기를 보고 있자면 이 재능 있는 배우가 이후 그저 그런 배우로 전락한 건 혹시 그녀의 지나친 아름다움 때문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브룩 쉴즈는 조디 포스터처럼 될 수 있었다. 쉴즈도 똑똑한 아역배우였고 그 표정은 누구보다 풍부했으며(짙은 눈썹은 트레이드마크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올 A’를 받은 IQ 155의 수재였다. 피아노 연주도 수준급이고 발레에도 소질이 있는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배우였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지독하게 착취했다. 브룩 쉴즈가 전성기에 출연한 영화들은 대부분 그녀의 아름다움 외엔 기댈 게 없는 졸작들이었다. 그녀는 영화로 기억되기보다는 잡지 화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같은 리스트로 존재하는 배우였다.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성숙한 그녀의 육체를 착취한 대표적인 영화는 <블루 라군>(1980)이었다. 15세에 출연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무인도 판타지’를 자극한다.
난파된 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무인도에서 함께 자란 리처드와 에멀라인. 태평양 위를 유유히 항해하는 배. 여기엔 두 꼬마가 타고 있다. 리처드(크리스토퍼 애킨스 분)와 에멀라인(브룩 쉴즈 분). 어느덧 틴에이저가 된 그들은 정신적인 사랑을 넘어 육체적 사랑을 나누고 아기까지 낳아 기르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당시 점점 문란해져가는 미국 청소년들의 성 문화에 악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보수 단체들의 항의에 시달려야 했고 나체로 수영하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이후 대역으로 밝혀졌다). 가슴에 긴 머리를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으로 필요 이상의 노출을 피하려 했으나 완벽한 어른의 몸이 된(당시 키가 178센티미터였다) 브룩 쉴즈의 ‘판타지 바디’를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끝없는 사랑>(1981)으로 인기의 정점을 찍은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이후 거인증에 걸렸다는 얘기와 스토커에 시달린다는 가십, 테니스 스타 안드레 애거시의 여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뿐이었고 아무도 그녀가 출연한 작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싸구려 영화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세기의 미녀’라는 칭송이 전혀 아깝지 않았던 여배우는 할리우드한테 비정하게 착취당하고 한순간에 버림받았다. 아마도 브룩 쉴즈만큼 아름다움과 배우로서의 성공이 반비례했던 배우는 찾기 힘들 것이다.
김형석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