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2010 WK리그 부산상무와 충남일화의 경기를 위해 심판진과 양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이날 경기는 관중석이 텅 빈 채로 진행됐다. 연합뉴스 |
#U-20 선전, 그러나
8월 9일 서울시청과 수원시 시설관리공단의 대교 눈높이 2010 WK리그 경기가 열린 고양종합운동장. 생각지도 못했던 U-20 여자월드컵 선전의 여파(?)인 듯, 케이블 스포츠 채널의 방송 중계 팀을 포함해 생각보다 많은 취재진이 찾았다. 한 공중파 방송국 보도용 카메라도 눈에 띄었고, 곳곳에서 선수들과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고양 대교나 인천 현대제철 등 나름 유명한 실업팀이 아님에도, 국내 유일의 여자 실업축구 리그인 WK리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축구연맹 관계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런 관심이 계속됐으면 한다”며 근심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맹 관계자의 예상은 적중했다. 정확히 일주일 뒤 16일, 같은 장소에서 드러난 풍경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부산 상무와 충남 일화의 경기가 펼쳐진 이곳을 찾은 취재진은 스포츠지 취재 기자와 사진 기자 등 2명이 전부였다.
더 이상 U-20 여자월드컵 선전에서 비롯된 ‘약발’은 먹히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몇 명 되지 않지만 같은 장소, 똑같은 위치에 자리 잡고 앉아 소리를 고래고래 내지르는 일부 관중들은 대개 선수 가족들이었다. 4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양종합운동장 스탠드에는 불과 400~500명 정도밖에 없었다. 16일에는 100여 명에 그쳤다. 그나마 U-20 여자월드컵을 계기로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란다. ‘혹시나’가 ‘역시나’에 그친 순간.
언제나 텅 빈 스탠드에 익숙한 여자 선수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위치로 다가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으나 현장에 있던 연맹 관계자와 여자 축구인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아무리 선전을 해도 일주일 ‘불꽃 관심’이 전부였네요.”
20세 소녀들의 선전 이후 인터넷 팬 카페를 통해 가입하는 자발적인 서포터스가 꽤 많이 늘어났다곤 해도, 또 저 멀리 부산에서 매주 WK리그 경기가 열리는 월요일마다 찾는 몇몇 여성 팬들이 있다고 해도, 이것만으로 여자 축구가 ‘붐 업’에 성공했다고 볼 수 없을 터.
그러나 올해로 출범 2시즌 째인 WK리그는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라고 했다.
라운드를 소화하는 지역은 화천, 당진, 고양 등 세 군데지만 유일하게 홈 팀 개념이 있는 대교 클럽을 지원하는 고양시뿐이다. 아마추어 스포츠 종목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고양시는 대교와 함께 어린이 팬들을 대상으로 축구 클리닉과 캠프를 여는 등 비교적 열성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교 축구단이 고양에서만 경기를 치르는 게 아닌 탓에 100% 연고 개념이 정착됐다고는 볼 수 없다. 작년에도, 올해도 여자축구연맹은 WK리그 경기를 소화할 장소를 물색하러 다니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양시 체육진흥과 계은영 전문위원은 “한국 여성들은 강하다. 남자에 비해 여자 축구가 세계 정상을 밟을 가능성이 현 시점에선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특히 풀뿌리 축구 못지않게 WK리그에도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매스컴도, 팬들도 계속 도와줘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시 태어나도 ‘축구’
U-20 여자월드컵 선전을 놓고 2002한일월드컵을 보고 자란 ‘키즈(Kids)’가 역사를 창조했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축구가 좋아 고된 과정을 무릅쓰고 축구화를 신었다는 의미였다.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9월 열릴 U-17 여자월드컵은 20세 언니들보다 훨씬 전망이 밝다고 한다. 기술이나 능력 등 모든 걸 고려했을 때 8강은 기본이고, 우승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여자 축구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 수 있는 주변 환경은 충분히 조성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들리고, 피부로 감지된 얘기는 우울했다.
“(축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여자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다시 태어나도 축구를 하겠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나중에 결혼해서 자신의 딸이 태어나면 축구를 시킬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문제라고 답했다.
서울시청의 선수 A는 “난 후회하진 않지만 자식에게는 어려운 길을 택하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배시시 웃었다.
수원시 시설관리공단의 선수 B 역시 “워낙 축구가 좋았기 때문에 직업 축구 선수의 길을 걷지만 2세가 혹시 운동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 미래가 밝은 종목을 택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물론 U-20 여자월드컵 이후 언론이나 팬들의 주요 포커스가 ‘감동’과 ‘사연’, ‘애절함’ ‘불쌍함’ 등 부정적인 쪽에 맞춰진 탓인지 여기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충남 일화의 선수 C는 “우린 불쌍하지 않다. 하고 싶어 축구를 했을 뿐이다. 남자 축구에 비해 비율이 어떤지 몰라도 모든 선수들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반짝’ 주목받는 건 더더욱 싫다. 똑 같은 시선, 똑 같은 대접을 원한다”고 당당한 코멘트를 던졌다.
하지만 솔직히 국내 여자 축구의 실태는 바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선수 수급부터 어렵다. 진로도 한정돼 있고 환경도 최악에 가깝다. 무엇보다 학교들이 자꾸 줄어든다. 서울에서 여자 축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는 딱 한 곳에 불과하다. ‘학력’을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이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20세 소녀들도 대부분이 초등학교 시절, 축구화를 처음 신었을 때 남자 선수들과 함께 운동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더욱 좋은 체력, 노하우를 익힐 수 있긴 했지만 결코 반가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U-20 여자월드컵에서 최인철 감독을 도운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 정성천 코치는 “여자 축구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에는 ‘사커 맘’이란 용어가 있을 정도로 관심이 많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워낙 익숙하지 않고 토양이 좋지 않다보니 부모들도 한두 명밖에 없는 귀한 딸에게 축구화를 신기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실 아쉬운 소식은 또 있다. 팀이 늘어나도 부족할 판국에 내년 WK리그 참가를 목표로 창단을 준비해온 부천시청의 작업이 전면 재검토되고 있는 것.
한 여자 축구 지도자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4년제 여자 대학팀이 만들어지고, 선수들의 진로가 열리도록 실업 팀이 많이 창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천시청의 창단이 보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정말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래프트에 참가할 선수들이 동요하고 있다. 실업자가 자꾸 늘어나는데 누가 마음 놓고 축구를 시키겠느냐”고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한국에 좋은 선수들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렇게 정체된 상태에서 늘 ‘기적’을 바라는 건 무리다. ‘운’도 ‘기적’도 환경과 틀을 만든 뒤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이상엽 전 여자대표팀 감독(한양여대)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