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내에 있는 탐묵헌. 연못과 잔디밭이 아름답다. |
경기도 파주 헤이리는 영화감독, 소설가, 음악가, 화가 등 문화예술 종사자들의 집단거주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그런데 제주도에도 그런 곳이 있으니 바로 한경면 저지리 문화예술인마을이다.
저지리는 제주도 서쪽 중산간 지역에 자리한 농촌마을이다. 공항을 중심으로 볼 때 약 1시간 거리인 이곳에 문화예술인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IMF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탄에 빠진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문화예술인마을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고, 저지리가 최종 대상지로 낙점되어 2001년 착공됐다. 그 결과 화가, 조각가, 극작가, 서예가, 음악가 등 모두 48명의 예술인들이 부지를 분양받아 저마다 특색 있는 건축물을 지어나가고 있다.
입주민 중에는 상록수의 명창 안숙선과 가수 양희은, 화가 박서보, 극작가 최완규 등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까지는 약 20여 동의 건축물이 들어선 상태다. 그러니까 이 마을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인 셈이다. 본래 북제주군 주관이던 것이 제주도 행정통합 결과 제주시로 이관되면서 사업이 다소 정체기를 맞는 등 그간 우여곡절도 다소 있었다.
문화예술인마을은 입주자들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이 마을은 단순한 거주공간의 개념을 넘어 적극적으로 문화예술을 생산해내고 소통하는 장으로서 역할을 한다. 입주자들은 작품 활동을 할 작업실과 전시실을 짓고 저지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이 마을을 찾는 모든 여행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을은 면적이 9만 9383㎡(약 3만 평)로 제법 넓은 편이다. 마을에는 입구에 공공주차장이 널찍하니 설치돼 있다. 그 앞에는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건물벽에 화가가 붓을 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만으로도 이곳이 예사 마을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대부분의 집들은 주차장 북쪽에 모여 있지만, 남쪽에도 더러 있기는 하다. 박광진 화백의 진갤러리와 조각가 박석원의 집들이 그것이다.
집은 개방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모든 집들이 대문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보다 그렇지 못 하는 곳이 더 많다. 입주자들이 한창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집을 비우는 날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묵헌, 먹글이있는집 등은 꾸준히 개방하는 편이다. 탐묵헌은 서예가인 동강 조수호의 집으로 예쁘게 만들어진 연못이 인상적이다. 연못 가까이 심어진 백일홍도 만발했다. 탐묵헌에는 매달 1회 이상 탐묵헌에 머물며 작업에 몰입해 온 조 씨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먹글이있는집’은 한글서예 대가인 한곬 현병찬의 집으로 상시 열어두며 자신의 작품들을 걸어두고 있다. 제주 출신답게 제주토속어로 쓴 작품이 특히 많다. 제주 토박이가 아니라면 읽어도 이해하지 못 할 말들이 많아서 한참을 수수께끼 풀 듯 그러한 말들에 매달리는 관람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모든 집들이 다 개방을 한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문화예술인마을은 그저 집들을 기웃거리며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건물 내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가꿔진 정원과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쯤은 대개 허락되는데, 고미술전문가인 양의숙 씨의 선장헌은 한옥과 숲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양 씨는 진품인지 위품인지를 가리는 TV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로서 그의 직업에 걸맞게 한옥을 아주 멋들어지게 지었다. 툇마루에 앉아 가을볕 쬐기에 아주 좋다.
▲ 탐묵헌 내에 백일홍이 붉게 피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예술인마을 내에 있는 현대미술관. 오른쪽 아래 사진은 사단법인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 이사장 현병찬 씨의 먹글이있는집. |
한편, 문화예술인마을 방문 때에는 조금 더 넉넉히 시간을 가지고 가도록 하자. 미술관을 둘러봐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에는 수십 개의 문화전시시설이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아프리카박물관, 영화박물관, 유리박물관 등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사립 테마박물관들이다. 미술관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대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이중섭미술관, 기당미술관 등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현대미술관과 제주도립미술관은 각각 2007년과 2009년 개관했다. 이들 미술관 중 현대미술관이 저지 문화예술인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다. 현대미술관은 공립미술관으로서 문화예술인마을 활성화 주도 및 부족한 전시공간 확충 등의 목적으로 설립된 곳이다.
미술관은 본관과 분관으로 나뉘어 있다. 본관은 지하1층, 지상2층의 연면적 1773㎡(약 540평), 분관은 지상1층의 연면적 166㎡(약 50평)로 되어 있다. 본관에는 김흥수 화백 특별전시실과 상설전시실 그리고 2개의 기획전시실 등이 있고, 분관은 박광진 화백 특별전시실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 주변에는 어린이조각공원과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김흥수, 박광진 화백은 문화예술인마을 입주자들이다. 김 화백은 하모니즘을 창시한 국내의 대표적인 원로화가로 현대미술관에는 대표작 20여 점이 기증돼 있다. 박 화백은 한국미협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인물로 미술관에 모두 149점을 기증했다. 그의 작품은 대지를 주제로 자연의 풍경을 담은 것들이 특히 많다.
현재 미술관에서는 특별기획으로 ‘한국의 멋-우리 문화 고찰전’을 개최하고 있다. 시, 서예, 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 한국의 전통미를 알리는 110여 점의 작품이 11월 2일까지 전시된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여행안내
▲길잡이: 제주시(공항)→1135번 도로(서부산업도로)→동광 나들목→오설록→유리의 성→저지문화예술인마을, 또는 제주시(공항)→1132번 순환도로→한림읍 명월리→1120번 도로→월림리→1136번 도로→저지문화예술인마을 ▲먹거리: 유리의성 근처에 명리동식당(064-772-5571)이 있다. 짜투리고기 전문식당이다. 제주도의 청정 돼지고기의 여러 자투리 부위를 불판에 올린 후 왕소금을 뿌려 구워먹는 곳이다. 2명이 가면 1인분만 시켜도 될 정도로 양이 푸짐하고, 고기 또한 신선하다. ▲잠자리: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서 유리의성 방면으로 가다보면 에덴통나무빌리지(064-772-3808)가 있다. 붉은소나무로 지은 건물이 인상적이다. 숙소 앞에 과수원과 산책로가 있다는 점이 또한 만족을 준다. ▲문의: 저지문화예술인마을(http://jeoji.invil.org) 064-773-1948, 제주현대미술관(http://www.jejumuseum.go.kr) 064-710-7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