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오후 중국 광저우 웨슈산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축구 예선 2차전 대한민국과 요르단의 경기에서 홍명보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뉴시스 |
#카리스마 대신 부드러움
홍 감독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다. 2002한일월드컵 때 히딩크호의 4강 진출을 확정지은 스페인과 8강전 승부차기 마지막 킥을 성공시킨 뒤 두 팔을 펼치며 기뻐하는 모습은 한동안 스포츠 팬 사이에서 회자됐었다. 오죽했으면 TV 광고 CF에서도 “홍명보가 웃었다”는 코멘트가 화제가 됐을까.
사실 홍 감독은 현재의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을 능가하는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현역 시절, 가까운 지인들 외에 그의 웃음을 본 이는 극히 적었다. 아니, 정말 허심탄회하게 만면에 웃음을 띤 표정이 더욱 그랬다. 항상 축구계 ‘카리스마’의 대명사로 불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에서, 1년이 지난 지금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홍 감독과 함께 하는 젊은 선수들은 한결같이 “우리 (홍명보) 감독님은 자주 웃는 편”이라고 입을 모은다.
홍 감독은 “난 달라진 게 없는데 정작 주변에서는 그렇게들 말한다”라고 한다.
처음 홍 감독이 청소년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을 때 가장 많이 나왔던 대화 주제는 “홍 감독이 과연 어떻게 현역 시절의 카리스마를 이어갈 것인가”였다.
그러나 모두 허를 찔렸다. 지도자 홍 감독은 선수 때의 카리스마를 버리고 180도로 변신했다. 지금 이 순간의 코드명은 ‘부드러움’이다.
진심도 섞였다. 선수 명단을 발표하고, 파주NFC에서 소집을 기다리며 “정말 설레었다”고 말했던 홍 감독이다.
최고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확실히 버렸다. 명령과 윽박, 강요는 전혀 없다.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온다. 숙소에서는 물론이고, 훈련장과 경기장에서 홍 감독은 반말로 지시하는 경우가 없었다. “정말 한 번도 반말한 적이 없느냐”고 모 선수에게 말하자 “정말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릴 적부터 워낙 홍 감독에 대한 얘기를 들어왔던 터라 알게 모르게 ‘강한 리더십’을 예상했던 선수들에게도 의외였다고 한다.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모든 지시에 “~했냐” “~하라” 등등의 강압적인 어투는 들을 수 없었다. 홍 감독부터 그러자 서정원 코치와 김태영 코치도 똑같은 행동을 취한다. “어린 선수들이다. 우리 세대와는 전혀 다르다. 이유를 대지 않는 무조건적 지시보다는 서로가 믿고 신뢰할 때 최고의 모습이 나올 수 있다.”
홍명보호가 소집될 때마다 늘 화제가 되는 섬김과 존중의 리더십이다.
▲ 지난 9일 오후 광저우 중다 스타디움에서 요르단과의 경기를 앞두고 열린 훈련에서 홍명보 감독이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
성적에 부담이 없는 스포츠 지도자가 어디에 있을까. 특히 전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축구라면 더욱 그렇다.
이제 막 ‘초짜’ ‘초보’ 꼬리표를 뗀 홍 감독에게도 성적은 필수 과제다. 한참 진행되고 있는 아시안게임의 부담감은 더욱 크다. 금메달은 곧 병역 면제를 의미하기에 부담이라는 또 다른 내부 변수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안고 있다. 프랑스 르 샹피오나에서 활약하는 박주영(AS모나코)이 구단과 마찰을 감수하고, 광저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도 군 면제를 위함이었다. 이미 해외 무대를 누비는 선수들은 물론, 해외 진출을 노리는 선수들에게 병역이라는 짐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홍 감독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포르투갈을 꺾고 2002년 월드컵 16강에 오른 뒤 인천 문학 월드컵경기장 라커룸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노력한 동료들이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한 이도 그였다.
하지만 홍 감독은 편안함을 주려고 노력했다. 광저우 입성에 앞서 파주NFC에서 훈련을 할 때 그는 “최선의 노력은 기울이겠지만 이번에도 금메달을 따지 못할 수도 있다”며 심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덧붙여서 “우리 선수들에게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대부분이 올림픽호로 이어질 2012년 런던 무대를 겨냥하기도 했다.
심리학 전문가를 초빙해 선수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가진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시안게임에서 홍명보호의 첫 상대는 북한이었다. 2010남아공월드컵 본선에 출전했던 선수들이 무려 10명 가까이 포함된 막강 전력의 팀과의 조별리그 1차전이라 경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됐다. 내내 일방적인 공세를 펼치고도 역습에 휘말려 0-1로 무릎을 꿇었다.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이라는 2, 3차전 상대가 남아있었으나 무조건 승점 6점을 챙겨야만 한다는 압박감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홍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역시 의외였다. “차라리 잘 됐다. 북한이 우리가 못할 정도로 강한 상대는 아니었다. 우리가 그간 아시안게임에서 번번이 실패해온 까닭은 유리한 경기를 펼치고도 역습 한 방으로 꺾였기 때문이다. 좋은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하겠다.”
자칫 동요할 수 있는 선수들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줌은 물론, 과거 사례까지 되새기며 선수들 스스로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요르단과 조별리그 2차전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도 홍 감독의 당당함과 세심함을 느낄 수 있다.
요르단을 무조건 꺾어야 하는데 심정이 어떠냐는 물음에 “배수의 진을 쳤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이어진 말도 흥미롭다. “대회 패턴이 작년 청소년월드컵 때와 같다. 그때도 첫 게임에서 좋은 내용을 보이고도 졌다. 기분이 좋다.”
패하고도 ‘기분이 좋다’고 답할 수 있는 여유. 행여 광저우에서의 금빛 낭보가 현실로 이뤄지지 않더라도 홍명보호의 밝은 내일이 기대될 수밖에 없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박주영 속에 박지성 보인다
▲ 지난 10일 오후 광저우 웨슈산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한국과 요르단의 축구 예선전에서 박주영이 조영철로 이어진 득점 어시스트를 성공한 후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박주영의 존재감
“마치 남아공월드컵에서의 박지성을 보는 것 같다.”
광저우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 관계자 A 씨는 뒤늦게 합류한 박주영이 선수단에 미치는 영향과 존재감을 남아공월드컵에서의 박지성에 비유했다. 합류 직전 소속팀 AS모나코의 차출 거부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박주영의 등장은 대표팀 선수들한테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기자들한테는 여전히 살갑지 않은 박주영이지만 후배들 앞에서는 완전 다른 분위기를 나타낸 모양이다. 홍명보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물론 선수들까지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들어온 박주영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박주영이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이미지를 풍기지만 대표팀 내에서는 완전 딴판이다. 선수들한테 그라운드 내에서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른 선수들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 자세히 조언을 해준다. 박주영은 선수들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리더십을 보여줘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남아공월드컵 동안 박지성한테 제대로 배운 것 같았다. 요르단전에서 보여준 박주영의 모습은 흡사 ‘필드의 감독’처럼 보였다.”
박주영의 존재감은 선수들이 박주영에 대해 얼마나 의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잘 나타난다. 요르단전 이후 도핑테스트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구자철은 “주영이 형이 뛰든 뛰지 않든 우리와 같은 팀에 있다는 것 자체가 든든하다”면서 “워낙 유명한 선수이고 해외에서 활약하는 선배이기 때문에 주영이 형이 말하고 행동하는 걸 모두 배우려고 노력한다”라고 선수들 분위기를 전했다고 한다.
#신광훈의 은인
요르단전에서 오른쪽 측면 수비로 활약하며 과감한 오버래핑과 정확한 크로스, 그리고 안정적인 수비로 팀의 대승을 이끈 신광훈한테는 평생 은인이 한 명 생겼다. 바로 대표팀 주치의인 송준섭 박사다. 신광훈은 지난 4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른 FC류큐와 연습 경기를 하다 상대 선수와 부딪히는 바람에 왼쪽 무릎을 다쳤다.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이었고 일본 현지 병원에서 MRI를 찍은 결과, 당분간 경기 출전이 어렵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홍명보 감독은 신광훈의 몸 상태를 보고받고 고심 끝에 신광훈을 대신할 교체 멤버를 떠올려야만 했고 곧 축구협회에 통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5일 광저우에 합류한 주치의 송준섭 박사가 신광훈의 몸 상태를 확인하면서 홍 감독도, 선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송 박사가 본 신광훈의 부상은 적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 안에 회복할 수 있는 경미한 부상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감독과 주치의의 신뢰가 두터운 덕분에 홍 감독은 송 박사의 진단을 믿었고 신광훈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대신 계속 대표팀에 잔류할 수 있었다. 요르단전에서 펄펄 날아다니는 신광훈을 지켜본 홍 감독과 송 박사의 마음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금메달을 향하여
흔히 아시안게임에서의 금메달 획득은 병역미필자들에게 병역 혜택을 제공받는 ‘단비’와 같다. 그래서 나이 어린 선수들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때는 대부분 병역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그러나 축구대표팀은 조금 다른 분위기를 나타낸다. 금메달 획득으로 병역 면제를 받으려 하는 것 이상의 확실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한 선수가 이런 얘길 했다. 지금 아시안게임 대표팀은 올림픽을 염두에 둔 선수 선발을 했기 때문에 선수들 대부분이 올림픽 출전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획득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올림픽을 마음껏 즐기고 싶다고 말한다. 즉 금메달 획득으로 병역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올림픽 무대에서 부담감을 없애고 자신감 있는 플레이를 펼쳐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홍명보호는 선수들 차출 문제로 선수들 전원이 손발을 맞춰 볼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주축 선수들이 지난해 U-20 월드컵 8강의 주역들이기 때문에 금세 적응했다는 게 A 씨의 전언이다. 구자철도 “U-20 때 호흡을 맞춘 선수들이라 그런지 오랜 공백이 있었지만 훈련과 경기를 하면 할수록 작년의 느낌이 되살아난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한국대표팀은 16강 진출 후 다시 북한과 만날 확률이 높다. 이에 대해 홍명보 감독은 예선 1차전에서의 패배가 좋은 예방주사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홍 감독은 북한과 다시 맞붙을 경우 절대로 선취골을 내주지 않을 계획이다. 북한은 먼저 골을 터트리면 바로 빗장을 걸어버리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요르단전 이후 상승세를 타고 있는 축구대표팀이 24년 만에 금메달 획득을 꿈꾸는 건 자만이 아닌 자신감으로 보인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