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이 참여정부 시절 친노 인사와 가깝게 지냈던 문병욱 전 라미드 그룹 회장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합성. |
문병욱 전 회장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함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 3인방’으로 불린다. 노 전 대통령은 셋 중에서도 고교 후배인 문 전 회장을 가장 각별하게 여겼다고 한다. 문 전 회장은 1998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관여했던 생수회사 장수천의 서울지역 판매처인 ㈜명수참물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취임 직후엔 노 전 대통령이 문 전 회장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 식사를 했던 유명한 일화도 있다. 지난 2008년 9월엔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한 부산상고 동문들이 문 전 회장 소유 경기도 양평 TPC 골프장에서 골프대회를 열기도 했다.
한 친노 인사는 “강 회장이나 박 전 회장과도 오랜 친분을 쌓긴 했지만 아무래도 도움을 받는 처지이다 보니 그들에 대해선 노 전 대통령이 약간 어려워했다. 그러나 문 (전) 회장에게만큼은 스스럼없이 대했다. 노 전 대통령 주위에 있는 많은 정치인들도 문 회장과 친하게 지냈다”고 털어놨다.
노 전 대통령과의 친분으로 참여정부 시절 ‘잘나가는 실세 기업인’으로 여겨지긴 했지만 정작 문 전 회장은 끊임없는 구설에 시달렸다. 2003년 초 국세청의 썬앤문 그룹 세무조사 무마 청탁 및 정치인에 대한 금품 공여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으며 실형(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데 이어, 2006년엔 회사자금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당시 정치권에선 문 전 회장이 회사에서 빼돌린 돈으로 비자금을 조성, 노 전 대통령에게 대선자금을 건넸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문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 임기 말 이뤄진 사면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유력하게 점쳐졌지만 부정적인 여론으로 인해 명단에서 빠진 바 있다.
문 전 회장의 ‘불운’은 정권 교체 후에도 계속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 검찰은 문 전 회장을 회사 자금 128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했다. 문 전 회장은 2010년 1월 열린 1심 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은 뒤 항소했으나 9월에 형이 확정돼 지금은 법정 구속된 상태다. 문 전 회장 소유로 돼 있는 강남지역의 한 호텔은 2009년 4월 성매매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국세청 역시 2010년 초 문 전 회장이 운영하는 사업장들에 대해 전 방위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해 수십억 원대의 추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사정기관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문 전 회장과 그 주변을 샅샅이 파헤쳤던 것이다.
이에 대해 문 전 회장의 한 지인은 “(문 전 회장이) 어느 정도 각오를 했던 것으로 들었다. 하지만 압박이 너무 심해 한때 사업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가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지금 수감돼 있으니 그것마저도 어렵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정권이 바뀐 후 사정기관엔 문 전 회장과 관련된 첩보들이 쏟아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박연차 전 회장이 대검 중수부로부터 수사를 받던 2008년 하반기에 집중됐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문 전 회장이 박 전 회장의 다음 ‘타깃’이 될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었고, 실제로 검찰 역시 문 전 회장에 대해 상당한 자료를 수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문 전 회장 ‘건’을 맡았던 검찰 고위 인사는 “박 전 회장보다 문 전 회장이 친노 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고 봤다. 문 전 회장 개인 비자금을 뒤져 보면 박 전 회장보다 더 많은 386 정치인들이 걸려들 것으로 판단하고 내사했었다. 그중엔 설만 있었던 노 전 대통령 대선자금도 포함됐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서거로 검찰 수사는 사실상 ‘올 스톱’됐고, 문 전 회장 ‘파일’ 역시 검찰청사 캐비닛 속으로 들어갔다.
올해 초부터 검찰은 미뤄뒀던 문 전 회장의 비자금 수사 시기를 저울질해왔고, 지난 10월 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6년부터 사실상 문 전 회장을 ‘전담’하다시피 해 온 서울중앙지검의 한 관계자는 “올 초 국세청이 문 전 회장 사업장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한 이후 우리도 때를 기다려왔다”면서 “얼마 전 그동안 축적해놨던 자료들을 다시 꺼냈고, 분석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를 놓고 검찰 내에선 여러 해석이 나오는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대대적인 사정 정국이 조성됐기 때문에 검찰의 정치적 부담이 덜했을 것이란 얘기가 들린다. 또한 중수부(C&그룹)를 비롯해 서부지검(태광·한화그룹), 북부지검(청목회 입법로비) 등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이 ‘히든카드’를 선보인 것이란 관측도 있다.
현재 검찰은 문 전 회장 최측근인 이 아무개 씨를 이번 수사의 ‘키 맨’으로 보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1956년생인 이 씨는 문 전 회장 곁에서 자금 부문을 오랫동안 맡았던 인물로 그룹 내에선 ‘실세’로 불린다. 그만큼 문 전 회장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이 씨는 2004년부터 고위직에 올라 사실상 회사 내 자금을 총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검찰은 이 씨가 문 전 회장의 숨겨진 비자금 행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미 한 차례 접촉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 자리에서 검찰은 이 씨에게 회사의 자금 흐름뿐 아니라 문 전 회장이 정치인들에게 돈을 건넸는지에 대해서도 확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씨는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전언이다. 앞서의 중앙지검 관계자는 “이 씨 역시 문 전 회장의 불법적인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 같다. 그래서 최대한 설득 중이다. 2년 전부터 이 씨와 문 전 회장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간극을 파고들고 있다”면서 “그룹 내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씨가 입을 열면 수사는 빠른 속도로 진척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소식에 친노 진영을 포함한 야권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박연차 게이트’보다 더욱 센 후폭풍이 불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민주당의 한 386 의원은 “검찰이 문 전 회장을 수사하고 있다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박연차 전 회장이 여권에도 타격을 입혔다면 문 전 회장은 그야말로 야권만을 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참여정부 시절 많은 정치인들이 문 전 회장 ‘후원’을 받은 것으로 안다. 또한 대선자금도 걸려 있지 않느냐. 문 전 회장 측근인 이 씨도 친노 정치인들과 안면이 많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한 친노 인사 역시 “최근 민주당이 대포폰, 불법사찰 등으로 공세를 가하자 여권이 반격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더군다나 문 전 회장을 수사하는 곳이 현 정부 실세들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노환균 지검장이 이끄는 서울중앙지검 아니냐”면서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야기했던 정치검찰의 행태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한편, 현재 수감 중인 문 전 회장은 변호사와 지인 등을 통해 이 씨와 검찰의 만남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