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연평도 도발 사태로 ‘햇볕전도사’ 박지원 원내대표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안보정국이 박 원내대표의 입지를 줄여놓고 있는 정황은 곳곳에서 확연해지고 있다. 국회는 11월 25일 북한의 무력도발 행위를 강력 규탄하는 결의안을 재석 의원 271명 가운데 찬성 261표, 반대 1표, 기권 9표로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북한의 연평도 포사격 행위를 남북기본합의서와 정전협정, 유엔헌장을 위반한 ‘무력도발 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에 침략행위 중단과 사죄, 재발방지 등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결의안은 한나라당이 제출한 것으로, 당초 민주당이 주장했던 문안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민주당은 북한의 행위를 규탄하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에 방점을 둔 결의안을 제출할 방침이었다. 하지만 하루 만에 한나라당의 결의안에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대북 결의안 채택에 발목 잡는 모습을 보일 경우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는 전날 연평도를 직접 다녀온 손학규 대표의 ‘현장감’도 작용했지만, 잔뜩 움츠러든 박 원내대표의 처지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원내대표는 사태가 발생한 지난 23일 트위터에 “정부는 확전 말고 민간인 피해방지 및 대책 강구를 촉구합니다”, “북한의 군사행동 중단을 거듭 촉구하며, 남북 공히 확전 말고 자제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날 저녁에도 “남북관계는 경제다. (연평도 포격으로) 세계 증시가 출렁, 오늘 우리 증시 환율도 요동, 북한 도발을 규탄하며 더 이상의 확전은 안 된다”면서 “평화와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남북교류협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했다. 곧바로 네티즌들에게서 “군인과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한 마당에 북한보다 정부 탓, 안보보다 경제 탓이냐”는 비난을 받았다.
다음날에는 박 원내대표실에 항의전화를 했던 한 시민이 ‘막말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한때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한 네티즌이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어머니가 박지원 사무실에 전화해 ‘각성하고 생각해서 말하라’고 했더니 사무실 여직원에게서 ‘그쪽 아들이 죽기라도 했나요’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박 원내대표 측은 “당시 중년 여성 A 씨가 전화를 걸어와 ‘연평도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보고 있냐. 내 아들이 연평도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하자 ‘그럼 아드님이 연평도에 계신 거예요?’라고 되물었고, 그 후로는 A 씨의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욕설만 들었을 뿐 우리 쪽에서 막말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했다. 북한의 추가도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민감한 시점에 뜻하지 않은 ‘설화’를 겪은 것이다.
더 큰 걱정은 안보 이슈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평화적 해결론’의 여론지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천안함 침몰사건 때는 직접적인 희생자가 군인의 신분이었고, 그 실체에 대한 논쟁도 겹쳐 있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대화를 통한 해결’이란 의제가 ‘강경대응’ 의제와 엇비슷한 지지도를 나타냈다. 심지어 지난 6·2 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전쟁이냐 평화냐’는 맞대응이 먹혀들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이 공개적으로 도발 사실을 시인하고, 민간인 희생자까지 발생한 이번 사태에선 사정이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11월 26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확전되더라도 강력한 군사 대응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44.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교전수칙에 따라 대응하되 확전은 막아야 한다’는 응답은 33.5%, ‘군사적 대응을 자제하고 외교적, 경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은 16.2%였다. 아직은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구호를 쓸 수 있는 시점이 아닌 것이다.
▲ 지난 24일 연평도를 방문한 손학규 대표와 정동영 의원. 국회사진기자단 |
물론 ‘남북관계가 험악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이명박 정권이 그간 햇볕을 가려왔기 때문’이라는 햇볕정책 옹호론도 여전히 있지만, ‘햇볕이 포탄으로 되돌아온 꼴’이라는 보수진영의 비판을 넘어서기에는 힘이 부친 듯하다.
더욱이 최근의 북한 동향을 보면, 한반도 긴장국면이 진정될 기미보다는 상승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것도 ‘햇볕정책’의 힘을 빼놓고 있다. 북한의 대외적인 공세 수위가 천안함 침몰사건, 김정은 후계구도 공식화,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공개, 연평도 포격 도발의 순으로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민주당으로선 불리한 안보정국의 돌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박 원내대표는 이 같은 사정을 감안했음인지 최근 유연한 병행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4대강 사업예산을 삭감해 국방과 민생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11월 29일로 예정돼 있던 ‘청와대 불법사찰 특검 도입과 4대강사업저지를 위한 대규모 장외집회’를 연기하는 대신 이명박 대통령을 겨냥한 ‘안보무능론’으로 맞공세를 폈다. 4대강 이슈가 묻혀버린 상황에서 정부의 안보무능론을 부각시킴으로써 연말 예산국회에서 대여 투쟁 동력을 되찾겠다는 의도다.
또한 연평도 포격의 근원적 책임을 현 정부의 대북강경책 쪽으로 돌려 ‘햇볕정책’을 둘러싼 당내 일각의 파열음을 조기에 진화하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다. 당분간 박 원내대표의 구상에는 뒷면에도 그림이 그려진 투 트랙의 카드가 들어있을 것 같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