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은 재임기간 ‘공산 주의로 회귀 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 로이터/뉴시스 |
필자가 폴란드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4월 대한체육회 부회장, KOC 부위원장 때 세계청소년펜싱대회 한국팀 단장으로 바르샤바 서북쪽 300㎞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즈난에 갔을 때였다.
포즈난에 도착하자 바르샤바에서 내려온 북한공작원이 미행하기 시작했고, 경기장에도 검은 안경을 끼고 코트를 입은 공작원이 높은 데서 내려다보기 일쑤였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한국팀은 감투상까지 받고 돌아왔다. 우리가 유일한 아시아 참가국이었고, 선물로 금성 라디오 몇 개를 가지고 간 기억이 난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우리 선수단 9명은 북한 공작원들의 미행을 따돌리고 좋은 추억을 간직한 채 리로 빠져나왔다. 혹시 납치 기도라도 있으면 대항하기 위해서 선수들에게 경기에 쓰는 사브르 칼 세 자루씩 백에 넣고 다니게 했다. 폴란드 측 조직위원회에 신변보호 요청을 했더니 “괜찮을 것”이라며 “알아서 스스로 주의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폴란드와의 본격적인 관계는 다시 1981년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제24회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폴란드에는 렉첵 IOC 위원, 렌케 ANOC 사무총장, 그리고 후에 대통령이 되는 크바시니에프스키가 국가올림픽위원장 겸 청소년체육부 장관(1988-1991)으로 있었다.
바웬사의 뒤를 이어 1995년부터 2005년 12월까지 10년간 2기를 대통령직을 맡은 크바시니에프스키는 1954년 폴란드의 비랄로가르드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주로 사회주의 학생연맹에서 활동했고, 1980년대에는 공산주의 정권의 청소년체육부 장관, 국가올림픽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연합노동당 사회민주당에 관계했고 그단스크 대학을 다녔다. 그단스크는 바웬사의 거점으로 유명한 곳인데 크바시니에프스키는 거기서 수송경제학과 무역학을 공부했고, 공산주의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위원장에도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 청소년신문 <Szlandar Mlodych>의 편집장도 지냈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청소년문제담당 장관, 그리고 1990년까지는 청소년체육장관을 지냈다.
88 서울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참가를 위해, 외교 관계도 없이 연락도 잘 안 될 때지만 IOC를 통해 계속 교섭을 하고 국제회의나 국제경기 때 접촉을 넓혀 나갔다.
1987년 필자와 아내, 그리고 김삼훈 국제국장(후에 UN대사)과 함께 바르샤바에 갔다. 폴란드 올림픽위원회와 폴란드 팀의 서울올림픽 참가 권유가 주목적이었고, 폴란드는 또 폴란드 NOC가 참가할 경우 지원과 편의를 받고 싶어했다. 부수상도 만났지만 나의 카운터파트는 크바시니에프스키 체육장관 겸 NOC 위원장이었다. 모든 협의는 원만하게 이루어져 참가 의향을 들었고 쾌적한 숙소, 수송, 훈련장소, 신분증 발급, 귀빈대우 등 지원을 약속했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교외의 굉장히 멋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때 크바시니에프스키가 말한 말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청소년의 중요성이었다. 나라의 장래에 청소년 교육과 운동이 제일 중요하고, 정치조직도 청소년만 장악하면 아무 문제없다는 말이었다. 청소년들은 곧 어른이 되고 국가의 기둥이 되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 청소년 조직을 바탕으로 바웬사를 꺾고 대통령이 되었으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서울올림픽 준비를 위해 폴란드 NOC 대표단이 두 번 서울을 방문했고 참가에 도움이 되는 모든 지원과 편의는 내가 독단으로 처리해 주었다. 동구 공산국가들과는 접촉이 없었고, 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도 부족할 때라 서방우방보다 더 신경을 썼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NOC 위원장으로서 폴란드 선수단 348명을 이끌고 서울올림픽에 참가했고 금2, 은5, 동9개의 메달을 땄다. 당시 필자는 공식규정 외 대동한 임원 206명의 추가 신분증을 발행해 주기도 했다.
크바시니에프스키가 서울에 있는 동안 신라호텔에서 그를 필두로 렉첵, 렌케, 그리고 폴란드 NOC 회장단을 위해 큰 만찬을 베풀었다. 그는 폴란드와 한국이 강대국 틈에 끼어 침략당하고, 분단되고, 착취당하는 등 비슷한 점이 많다며 한국의 발전에 관심을 보였다. 소련을 아주 싫어했고 1940년 카틴의 숲에서 폴란드 장교 2만 5000명이 소련에 의해 학살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90년대 들어 나는 대통령 특사로 동구 3개국에 가서 경제협력 문제와 통일정책을 설명하였다. 어디가나 IOC 집행위원이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킨 사람, 서울올림픽 때 자기나라 임원 및 선수들을 환대해 준 사람으로 후대를 받았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때 필자가 부위원장이었다는 점이 더욱 무게를 실어준 것 같았다.
그때 간 곳 중 하나가 유고슬라비아, 헝가리에 이어 폴란드였고, 폴란드는 동구권에서 공산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로 이미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돼 정권 인수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폴란드 정부에도 이미 바웬사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대통령 특사 보좌역으로는 박노벽 3등서기관을 대동해, 필자는 아내와 3명이 움직였고 현지에서는 한국 대사들이 수행했다.
야루젤스키 대통령에게 통일정책을 설명했는데 한참 듣더니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꼭 김일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고 했다. 내 인상이 좀 시무룩하게 보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곧 웃으면서 서울올림픽 때 많이 도와주어서 감사한다는 뜻을 밝히고 회담을 끝냈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청소년체육장관은 그만두고 NOC 위원장만 맡으며 아주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연락이 와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폴란드 올림픽위원회로 갔더니 크바시니에프스키 위원장, 슈벤스카(Schwenska) 부위원장(현 IOC 위원)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체제가 달라져 정부지원이 없어져 서방식으로 스폰서를 잡아 자립해서 선수를 육성해야 할 처지라고 호소한다. 당시 정부 지원이 끊긴 모든 공산국가가 그런 입장에 처해 있었다.
1995년 크바시니에프스키는 마침내 바웬사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7년 모나코의 국제경기연맹(GAISF) 총회에 필자의 손님으로 와서 기조연설을 해주고 파리 호텔의 처칠룸(처칠 수상이 썼다해 붙여진 이름)에서 GAISF 회장으로서 집행위원들을 배석시켜 그를 위해 만찬을 주최했다. 모나코의 레니에 대공은 늘 참석해 주었지만 GAISF총회에 국가원수가 와서 기조연설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그는 스포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또 1995년에 대통령이 되기 전 91년부터 95년까지 민주 좌익연합(Democratic Left Alliance) 대표로 국회 외교위원, 그리고 헌법위원장으로 활약했다. 91년 바르샤바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때는 최다 투표를 기록했다.
그는 1995년 바웬사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될 때, ‘우리의 미래’, ‘모두를 위한 폴란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가 곧 공산당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반대파의 공세는 근거 없는 비난으로 판명났다. 그는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폴란드를 가입시키고 부제크(Buzek)의 우파 정부와 연정도 펼쳤다. 그의 인기는 대부분 50%대였지만 높을 때는 80%까지 치솟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스탈린 시대의 수정 헌법을 신헌법으로 바꾼 것이었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2000년 재선 때 53.9%의 지지를 받았고 “폴란드 모든 사람에게 집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의 치하에서 폴란드는 ‘국제 테러’에 대한 투쟁에 앞장섰고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 됐다. 심지어 놀랍게도 이라크전쟁에 파병까지 했다. 이라크 파병은 동유럽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또 국영 기업체를 민영화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 97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총회에서 필자와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에도 그는 먼 길을 달려왔고 만나자마자 자기가 개혁을 해보니 2년만 지나도 못하겠다고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막 당선되어 취임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인데 필자에게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면 개혁은 임기 초 2년 안에 해야지 3년이 지나선 못하게 된다고 조언을 전하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또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처럼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을 구속한 것을 아주 잘못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퇴임 후 2006년에 미국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의 석좌교수로 위촉되어 외교학과에서 유럽과 미국관계, 그리고 중부와 동부유럽의 민주화 문제를 다뤘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1979년에 변호사인 졸랜타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스포츠를 사랑하고, 폴란드를 사랑한 그는 공산치하에서 터득한 청소년운동을 바탕으로 민주화, 친서방 시장경제국가를 세운 개혁파 정치가로 기억된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