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4월 영국 현지에서 만난 이청용. 시즌 내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볼턴 원더러스의 간판으로 자리 매김했다. |
“크리스마스 때 뭐하세요? 저요? 에이, 전 26일 경기 때문에 훈련장을 지켜야 해요.” 지난 12월 24일, <일요신문> 송년 특별 인터뷰에 어렵게 응한 이청용은 질문을 하려는 기자에게 대뜸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물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다는 얘기를 전한 뒤 그의 스케줄을 물으니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해야지, 어딜 가겠냐면서 말이다. 이청용은 26일(현지시간), 웨스트 브로미치전을 마친 후 곧장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로 향해 한국대표팀 전지 훈련 캠프에 합류한다. 이청용이 살고 있는 볼턴의 워터슬리드라이브라는 동네는 한 달 전부터 집집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이 조명등을 달아 놓는 등 연말 분위기로 가득하지만 정작 이청용의 집에는 작은 트리조차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혼자 지냈다면 그런 소품들로 외로움을 달랠 법한데, 지금은 가족들이 모두 영국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심심할 틈이 없단다.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박지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이청용. 영국 데뷔 첫 해, 5골-8도움을 기록하며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한 그는 각종 상들을 휩쓸며 볼턴의 블루드래곤으로 입지를 다졌다. 2010 시즌에도 18경기 가운데 17경기에 선발 출전해서 2골-5도움을 올리며 볼턴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생애 첫 경험이었던 남아공월드컵에서 두 골을 넣는 등 2010년을 가장 알차게 보낸 이청용과의 인터뷰는 전화와 이메일로 이뤄졌다.
―송년 특별 인터뷰를 위해 먼저 이메일을 보냈는데 대답이 너무 짧고 아쉬운 부분이 많아 전화 연결을 부탁했어요. 혹시 팬들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있나요? ‘옆집 동네’에 사는 박지성 선수한테는 ‘초코파이’가 쏟아지고 있다던데….
▲하하 저한테도 조금씩 선물은 와요. 물론 지성 형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요. 팬들이 편지를 가장 많이 보내주시더라고요. 간혹 군것질거리도 보내주시고요. 특별한 선물은 없어요. 기억나는 선물이라면 불량 식품을 보내주신 분 정도? 이전 학교 다닐 때 문방구에서 팔던 불량식품들 있잖아요. 그런 걸 소포로 보내주시더라고요.
▲ 리터칭=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친구들과 싸운 적은 있죠. 심하진 않았고 남자 아이들이 흔히 싸우는 정도는 해봤어요. 심하게 사고 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바른생활까지는 아니고 그냥 평범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흔히 운동선수들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좋은 차를 구입하거나 명품 쇼핑을 즐기는 등 외적인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더라고요. 이청용 선수는 이런 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요.
▲절 너무 좋게만 보시는 거 아니에요(웃음)? 저도 좋은 차, 명품 등에 관심 많아요. 단, 정말 저한테 필요한지, 꼭 사야만 하는 건지 고민하고 구입하는 편이죠. 성격상 욕심난다고 마구 사들이지 못해요.
―흔히 박지성, 이청용하면 ‘수도승’같은 남자라는 표현을 해요. 훈련장과 경기장, 집을 오가는 반복적인 생활 외에는 특별한 취미 생활이나 외출 등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 같은데, 이청용 선수가 보기엔 두 사람 중 누가 더 수도승처럼 생활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보단 지성 형이 더 수도승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요? 전 여기에 가족들도 있고, 물론 지성 형도 부모님이 종종 오가시지만, 대부분 형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거든요. 전 가끔씩 쇼핑도 하고 그러는데 지성 형은 훈련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요. 맨체스터에는 유학생들도 많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출을 즐기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간혹 느끼는 부분이 저랑 지성 형이랑 많이 비슷하다는 사실이에요.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지 않고, 축구 외엔 별다른 관심을 두지도 않고, 한마디로 재미없는 남자들이죠.
―최근에 박지성 선수가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을 은퇴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소식 듣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궁금해요.
▲예전부터 형이 자주 했던 얘기라 크게 놀라진 않았어요.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같이 대표팀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은 형의 의견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퇴 얘기 듣고 형이랑 통화도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무슨 투표하고 그러시잖아요? 형의 은퇴에 대해 찬반 투표, 그런 거요. 그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선수가 정말 많은 고민과 갈등 끝에 은퇴를 결심했는데 제3자가 찬반 투표를 하는 부분이 좀 그렇지 않나요?
▲ 2010년 9월 26일 펼쳐진 EPL 볼턴과 맨유의 경기에서 이청용과 박지성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그렇게 말씀해주신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요. 정말 지성 형의 후계자가 되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더 큰 선수로 성장해야 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전 아닌 것 같아요. 그 타이틀 자체가 너무 버거워요. 그냥 전 열심히 축구만 할래요^^.
―볼턴이 입단 첫 해에는 하위권에서 벗어나질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프리미어리그 중위권팀으로 올라섰는데, 선수 입장에서도 기분 좋은 변화일 것 같아요.
▲그렇죠. 저도 우리 팀 성적이 이 정도까지 올라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나름 분석을 해보니까 스쿼드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다가 저랑 요한 멜만더, 케빈 데이비스 라인으로 연결되는 삼각편대가 짜임새를 이루면서 공격력이 살아난 것 같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난 시즌에 비해 조금 더 여유가 생긴 부분도 있어요. 아무래도 경험이 쌓이면서 경기를 풀어가는 움직임이 달라지지 않았나 싶어요. 월드컵 경험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이미 지난 얘기지만 아시안컵 차출 문제로 오웬 코일 감독이 축구협회에 이청용 선수의 차출 연기를 부탁했을 정도였는데 선수 입장에선 조금 난처한 상황이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죠. 26일 경기 이후 첼시, 리버풀 등 강팀과의 경기가 계속되니까 감독님 입장에선 한두 경기라도 조금 더 뛰게 한 다음 보내고 싶으셨을 거예요. 솔직히 조금 눈치 보였어요. 선수들도 감독님 앞에서 ‘청이 (아시안컵에) 언제 가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오늘도 훈련 끝나자마자 선수들이 또 그 얘길 꺼내더라고요. 저한테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팀에서 보내주면 가는 거잖아요. 팀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오웬 코일 감독이 지난 선덜랜드전에 이청용 선수를 교체 명단에 올려놓았다가 결국엔 출전시키지 않았어요. 이번 시즌 첫 결장이라 그 배경을 놓고 추측이 분분했는데, 경기 전 자신이 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나요?
▲경기 전날 호텔에서 감독님이 절 방으로 부르시더라고요. 지난 2년간 쉰 날이 며칠 안 된다면서 체력 보충 차원에서 이번 경기는 쉬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물론 겉으로는 체력 안배를 해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근 경기에서 제가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잖아요. 그 이유도 포함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기사를 보니까 아시안컵에서 뛰게 되니까 일부러 빼주신 거라고 하는데, (웃으면서) 우리 감독님, 지금 그럴 만한 여유 없으시거든요.
―혹시 오랫동안 소속팀에서 나와 있으면 ‘자리’에 대한 불안감, 그런 거 있어요? 워낙 선수들끼리 경쟁이 치열하니까요.
▲당연히 있죠. 우리 팀에 20여 명의 선수가 뛰고 있는데 빈말이 아니라 기량이나 실력이 모두 엇비슷해요. 벤치에 앉지 못하는 선수들 중에서 얼마나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요. 스쿼드에 포함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빠져도 지금의 볼턴 경기력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많이 달라져야 하는데, 너무 안 달라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하하.
―손흥민 선수가 아시안컵 대표팀에 합류했어요. 이전 이청용 선수의 모습이 생각날 것도 같은데요.
▲나이 어린 선수가 외국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대표팀에 합류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축구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봐요. 아직 손흥민이랑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했지만 같이 대표팀에서 뛰게 된다면 저한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 선수에 대한 기대감이 크고 이번 아시안컵이 조광래 감독님이 이끄는 첫 국제대회라 점점 설렘과 긴장감이 커지고 있어요.
―이전에 조광래 감독의 훈련을 ‘만화 축구’ 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어요. 훈련의 어려움을 토로한 걸로 아는데 아시안컵에서 그 ‘만화 축구’가 잘 그려질 수 있을까요?
▲그 말을 이상하게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말한 의미는 훈련 자체는 아주 어렵지만 감독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만들어 간다면 만화 축구처럼 잘 짜인 그림이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였어요. 선수들이 한 마음처럼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해요. 연습을 통해서 그걸 완성시키려는 게 감독님 생각이시고, 그게 경기에서 잘 나타날지는 해봐야 알겠죠.
―프리미어리그 말고 다른 리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리그에서 뛰어보고 싶어요?
▲스페인리그와 J리그예요. 특히 J리그는 한국과 가깝고 문화도 비슷한 데다 좋은 선수들, 구단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더욱이 축구장을 찾는 관중들이 엄청나고요, 경기장 시설도 잘 돼 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J리그는 꼭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와 언제 결혼할 거예요?
▲하하. 구체적인 시기를 말할 수는 없지만, 일찍 가긴 갈 것 같아요.
―새해에도 여전히 ‘싱글’인 박지성 선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젠 꽁꽁 숨겨둔 형의 짝꿍을 얼른 공개하세요! 순전 제 생각입니다(웃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기)성용이랑 저랑 지성 형한테 자주 말하는 내용이에요. 하도 여자친구가 없다고 하니까 혹시 숨겨놓은 여친이 있는 거 아니냐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2010년 가장 힘들었던 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흠, 아마도 충분한 휴식 없이 계속 경기를 뛰었던 일이 아닐까 싶어요. 체력적인 부담이 엄청났거든요. 그리고 월드컵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남아공 무대를 누볐던 경험은 제 축구인생에서 최고로 짜릿한 순간이었고 최고의 감동이었어요. 결과에 대해선 여전히 아쉬움이 남지만 그런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2010년 최고의 선물 아니었을까요?
이청용은 마지막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박지성과 함께 아시안컵에서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 생활을 하며 더욱 가까워진 박지성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자신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에 ‘만약 친한 후배가 외국으로 진출한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냐’는 질문에 ‘겸손하되 자신을 너무 낮춰 생각하지 말라. 무엇보다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했다. 이청용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느끼는 부분이지만,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겸손함, 그리고 차분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자신감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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