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가 인기 있다 보니 지들이 연예인인 줄 안다. 요즘은 사고 치는 것도 딱 연예인 수준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모 구단 단장은 심기가 불편한 듯 몇 번이나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가 말한 ‘지들’은 프로야구 선수들이었다. 그도 그럴 게 몇 년 새 프로야구 선수들의 사건·사고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간통, 강간, 음주운전, 폭행에다 이번엔 폭주족 혐의까지 받고 있다. 야구인들은 입을 모아 “700만 관중 동원보다 시급한 게 야구계의 정화”라며 “신상필벌 원칙에 따라 사고 선수들을 확실히 징계해야 사건·사고가 줄어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네티즌 수사대 추적
지난 1월 24일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안전과는 심야 도로에서 자동차 경주를 벌인 혐의로 현직 프로야구 고 모 선수(27) 등 폭주족 146명을 적발해 등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나머지는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야구계의 관심을 끈 건 고 모 선수의 정체였다. 아니나 다를까 네티즌 수사대는 경찰 발표가 나오기 무섭게 27세의 고 모 선수가 누군지 밝히려 동분서주했다. 곧바로 몇몇 선수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S 구단의 고 모 선수와 D 구단의 고 모 선수 두 명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D 구단은 그룹회장이 나서 트위터를 통해 “고 모 선수가 우리 구단 선수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구단 역시 발 빠르게 홈페이지를 통해 사실이 아님을 강조하며 의혹을 봉합시켰다. 나머지 S 구단 역시 “소속팀 선수가 지난 9월쯤 한적한 도로에서 신호위반에 걸린 시점에 때마침 폭주족 차들과 마주친 적은 있지만, 폭주족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두 구단의 해명대로라면 경찰의 발표는 와전됐거나,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경찰의 입장은 다르다. 경찰 관계자는 “고 모 선수가 다른 폭주족들과 함께 적발된 것이 사실이고, 현재 기소된 상태”라며 “무혐의를 주장하는 건 선수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만약 경찰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고 모 선수는 몸이 생명인 프로야구 선수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폭주 때문에 프로야구와 구단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두 구단은 경찰 발표가 사실로 밝혀지면 해당 선수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는 자세다.
#윤승균 KIA 입단 좌절
폭주족 사건이 터지기 일주일 전, 인터넷 야구게시판엔 ‘프로야구 선수가 공인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두산에서 퇴출당한 윤승균이 KIA에 입단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진 게 발단이었다.
2005년 홍익대를 졸업하고 두산에 사실상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한 윤승균은 그해 도루 39개를 기록하며 이 부문 2위에 올랐다. 대부분 대주자로만 출전해 기록한 도루들이었다. 그즈음 ‘기동력 야구’를 모색하던 두산은 윤승균을 다음 시즌부터 1번 타자로 쓰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또 하나의 연습생 신화가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해 12월 윤승균은 성범죄를 저질러 구속됐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성을 차 안에서 성폭행했다는 혐의였다. 윤승균 측은 “합의로 이뤄진 성관계였다”며 “여성이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등 되레 계획된 범죄에 자신이 속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법원은 윤승균의 주장을 일축했다. 윤승균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 임의탈퇴선수로 1년간 자숙 기간을 가졌다.
사회봉사활동과 반성으로 어느 정도 자숙기간이 지났다고 판단한 두산은 2007년 5월 윤승균의 1군 복귀를 시도했다. 하지만, 팬들은 환영 대신 반대 의사를 밝히며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에 ‘윤승균 복귀 반대 서명’을 실시했다. 두산은 팬들의 의견을 반영해 윤승균의 1군 복귀를 포기했다.
지난해 두산이 윤승균을 퇴출하며 그의 선수생활도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복귀 꿈을 저버리지 못한 윤승균은 지난해 11월 KIA 2군 훈련에 합류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애초 KIA는 윤승균의 주력과 야구센스를 높이 사 입단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또다시 야구팬들의 거센 반대가 시작됐고, 입단은 무산위기에 놓였다. 급기야 1월 21일 KIA는 홈페이지를 통해 “윤승균에 대한 테스트를 중단하기로 하고, 퇴출을 통보했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이를 두고 많은 야구팬은 “프로야구 선수가 공인인 만큼 일반인보다 더 엄한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성폭행 같은 중대 범죄를 한때의 ‘실수’로 치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KIA의 결정에 환영의 의사를 나타냈다. 이와는 반대로 일부 야구팬은 “프로야구 선수는 공인이 아니라, 유명인일 뿐이고, 윤승균은 5년간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며 “살인자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게 일반적인 사회”라며 KIA의 결정을 가혹하다고 평가했다.
#선수들 봐주기 많아
야구계는 그간 사회적 물의를 빚은 선수들에게 KBO와 구단이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주장한다. 모 야구해설가는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KBO와 자기 팀 전력강화에만 몰두한 구단들이 말로만 징계를 외칠 뿐 실상은 눈감고 봐주기에 급급하다”며 “선수들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솜방망이 처벌이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KBO 야구규약 제14장 유해행위 제145조 ‘마약 및 품위손상 행위’엔 ‘감독, 코치, 선수 등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등 프로야구의 품위를 손상할 시 총재는 영구 또는 기한부 실격처분, 출장정지, 야구활동중지, 제재금, 경고처분 기타 적절한 제재를 과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대부분은 제재금, 경고처분 등 가벼운 제재나 10경기 미만의 출장정지 처분으로 끝났다.
지난해 겨울 전(前) 오릭스 버팔로스 투수 마에카와 가스히코는 SK를 찾아와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결과는 불합격. 이유는 그의 과거 행실 때문이었다. 왼손 강속구 투수로 일본프로야구에서 이름을 날리던 마에카와는 2007년 1월 무면허 상태에서 운전하다 건널목을 건너던 20대 여성을 치고 그대로 달아나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피해 여성은 단순 타박상에 그쳤지만, 마에카와가 책임져야 할 몫은 컸다. 오릭스는 바로 마에카와를 방출했고, 다른 일본구단들도 그의 영입을 거부했다. 결국, 마에카와는 미국에 진출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와 독립리그에서 뛰었다.
SK 입단이 좌절되고서 마에카와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구에선 내일의 경기가 기다리지만, 인생은 오늘 한 경기로 끝날 수도 있다. 그걸 지금 배우고 있다.”
마에카와 이후 일본프로야구 선수들의 도로교통 범죄는 80%나 급감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