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보 감독을 경험한 선수들은 하나같이 “그가 그립다”고 말한다. 이런 인기의 비결을 묻자 “걸그룹들을 연구한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차도남’이 아닌 따뜻한 도시 남자, ‘따도남’이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먼저 일본전 얘기부터 해보자. 이 기사가 나올 때쯤이면 이미 ‘지난 일’로 치부되겠지만 오늘 새벽 끝난 일본전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다.
▲경기가 끝났는데도 여운이 남아서 그런지 잠이 안 오더라. 연장 마지막 순간에 동점골을 넣은 것까진 좋았는데…, 누구보다 선수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전 경기에서 너무 체력을 소진했던 게 일본전에서 체력 부담으로 다가왔다. 황재원이 동점골을 터트렸을 때 우리한테 운이 오는 줄 알았다.
승부차기 땐 나도 떨렸다
―승부차기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키커 순서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만약 홍 감독이라면 어떤 선수를 가장 먼저 내보냈을지 궁금하다.
▲결정은 전적으로 감독 몫이다. 훈련 때부터 그 선수들이 잘 찼기 때문에 순서를 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기 종료 마지막까지 우리가 지고 있었던 상태라 감독 입장에서 승부차기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본다.
―모든 건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박지성이나 기성용을 1, 2번으로 배치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내가 대표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을 때 젊었을 때는 PK를 전담해서 찼다. 어린 나이에는 PK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고 고참이 되면서부터는 PK를 안 찼다. 시합에 지게 되면 그 부담감이 두 배 이상이 된다. 박지성도 그런 점에선 승부차기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스페인전에서는 1번이 황선홍, 5번이 주장 홍명보였다.
▲그 당시 승부차기 순번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얘길 듣고 쓰러질 뻔했다. 솔직히 히딩크 감독이 날 빼주길 바랐다. 더욱이 5번이란 가장 중요한 자리에 어떻게 날 집어넣을 수 있는지 잠시 원망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나보다 먼저 찬 스페인의 호아킨 선수가 실축을 했기 때문에 내가 여유 있게 골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승부차기하는 선수가 느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 아시안컵 3, 4위전을 앞두고 있다(한국이 우즈벡에 3 대 2 승리). 자연스레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한국과 이란의 3, 4위전이 떠오른다. 당시 전반전까지 0-2로 지고 있다가 후반에 4골을 몰아치면서 4-3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지 않았나.
▲그동안 한국이 아시아 최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정작 아시안게임에서는 24년 동안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그래서 광저우아시안게임의 목표는 무조건 금메달이었고, 그 아시안게임을 통해 2012년 런던올림픽을 준비하려고 계획했다. 반대도 있었지만 올림픽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23세를 제외한 21세 이하 선수들로만 대표팀을 구성했다. 그러다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고 3, 4위전을 치르게 됐는데 선수들에게 딱히 할 말이 없더라. 그런 상황에서 전반전을 0-2로 마치는 순간, 이런 점수로 후반까지 가게 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는 말이 대표팀 감독 사퇴를 의미했던 건가.
▲그렇다. 난 선수들한테 권한을 위임했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감독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대표 감독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만둬야 하는 자리다. 그날 전반전 상황이라면 후반 들어가서 두세 골 더 먹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최악의 결과가 도출된다면 당연히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후반전에서 네 골이나 넣을 줄 누가 알았겠나(웃음).
▲ 2009년 홍명보 감독이 U-20월드컵 C조 3차전에서 미국을 꺾은 선수들을 끌어안으며 자축하고 있다. 연합뉴스 |
▲결과가 좋지 않았는데 좋은 평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축구에 대한 문외한이라고 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감독의 역량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2년 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나와 함께한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도 컸다. 난 감동이 있는 대표팀을, 스토리가 있는 대표팀을 만들고 싶었다. 모여서 운동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올림픽 메달이라는 위대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고자 했다. 그 진행 과정에 있는데, 선수들이 아시안게임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고, 팀다운 팀을 만들었다. 잃은 것도 있는 대회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얻은 게 많은 아시안게임이었다.
―혹시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맡고 나서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시행착오가 있었나.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경험이 없다는 비난이 있었다. 물론 감독 경험은 전무했지만 대표팀 코치로 생활하며 나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두렵다거나 지도자 자격 요건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행착오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감독으로 군림하기보다는 선수들과 ‘동행’하고 싶었다. 대표팀은 훈련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안에서 선수들이 얼마나 즐겁게 놀다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난 지난 2년 동안 선수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왔다.
기부천사, 아들한텐 짠돌이
―‘홍명보호’를 거친 선수들은 대표팀 생활이 끝난 이후엔 이구동성으로 ‘홍명보 감독님이 그리울 것 같다’는 말을 한다. 도대체 어떤 매력을 어필한 건가(웃음)?
▲어쩐지 아이들이 문자를 많이 보내오더라(웃음). 내가 존중받으려면 선수들을 존중해줘야 한다. 내가 진심으로 선수들을 아끼고 좋아한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다소 무뚝뚝했던 내가 대표팀을 맡으면서 많이 달라졌다. 선수들에게 농담도 건네고 세대 차이를 좁히기 위해 걸그룹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청소년월드컵 때는 2NE1(투애니원)의 ‘I Don’`t Care’를, 아시안게임 때는 이현과 2AM 창민이 불렀던 ‘밥만 잘 먹더라’를 자주 들었다. ‘밥만 잘 먹더라’는 아시안게임 준결승전에서 지고 들어오면서 ‘기죽지 말고 밥 잘 먹고 힘내자’는 의미에서 들었던 노래다.
―홍명보 감독과 걸그룹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 그림이다. 선수들을 생각하고 관심을 드러내는 만큼 두 아들한테도 자상한 아빠인 편인가.
▲자식한테는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선 자상하려고 노력하지만 예절과 사람의 도리에 대해선 엄격한 편이다. 한 번은 큰애가 나한테 ‘딴 사람들한테는 몇 억씩 주면서 왜 아들인 나한테는 용돈을 안 주느냐’고 항의를 하더라. 신문에 장학금 전달식 기사가 나온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든 모양이다. 선수들과는 달리 아들이랑 함께 걸그룹 노래를 듣진 않는다(웃음).
―FC서울의 빙가다 감독이 물러나면서 후임 감독 영순위로 홍 감독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프로팀 감독이 공석일 때마다 제일 많이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2012년 이후, 프로팀 감독 자리를 제의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 같나.
▲실제로 2~3년 전부터 몇몇 프로팀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었다. 외국에서도 오퍼가 있었다. 그러난 난 지금 이 선수들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약속이 있었다. 바로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는 같이 가자는 내용이다. 아시안게임처럼 국제대회에서 터무니없는 패배를 당해 감독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상황만 아니라면 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 선수들을 버리고 가진 않는다. 좋은 팀으로부터 감독직 제안을 받긴 했어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워낙 반듯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인해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정치권의 러브콜을 많이 받는 걸로 알고 있다.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경쟁을 펼칠 때 나한테 직접적인 제안을 했던 건 아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영입 제의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만약 정몽준 전 축구협회 회장이 정치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대선 경쟁에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나 난 지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홍보대사라서 정치나 정당 가입 등의 행위를 할 수가 없다.
―아시안컵을 통해 손흥민 선수의 활약을 처음 지켜봤을 텐데, 그를 올림픽대표팀에서도 볼 수 있는 건가.
▲공격성이 굉장히 강한 선수이고 빅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 매력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아직 그를 뽑을지, 어떨지 고민해 보지 않았다. 성인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과의 역할 차이가 크기 때문에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지성이 영표…웃으며 보내길
―이제 오는 6월 열리는 2010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2차예선을 시작으로 한국축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향한 대장정의 막이 오른다. 월드컵 예선을 치르는 성인대표팀과 선수 구성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서정원 코치가 성인대표팀으로 옮겨가는 걸 보면서 조광래 감독님이나 축구협회와의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구자철, 지동원, 윤빛가람 홍정호 선수 등은 우리한테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수들이고 그들이 빠진 올림픽대표팀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조광래 감독님이 많은 도움을 주실 거라고 믿는다.
홍명보 감독은 이영표, 박지성의 대표팀 은퇴와 관련해서는 “그 선수들 때문에 우리가 많이 행복했었고 축구를 더 사랑하게 됐다. 이젠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박수 치면서 그들의 어깨에 놓인 짐을 내려줄 때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