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이사직 사임은 책임회피 꼼수…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강화 나설 것”
지난해 3월부터 지금까지 쿠팡 사업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는 밝혀진 것만 9명이다. 강은미 의원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청문회’ 등에 출석한 쿠팡 관계자에게 사과와 사후 대책을 강력히 요구해왔다. 10월 국감에 출석한 엄성환 쿠팡풀필먼트 전무는 ‘심심한 애도’를 표하거나 대답을 회피했다(관련 기사 [현장] “사과냐?” “심심한 애도” 국감장 선 쿠팡, 끝내 사과 없었다).
지난 1월 청문회에 출석한 노트먼 조셉 네이든 쿠팡풀필먼트서비스 대표는 칠곡물류센터에서 야간 노동을 하다 과로사로 사망한 27세 고 장덕준 씨 유가족에게 사과하면서도 ‘과로사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관련 기사 ‘산업재해 청문회’ 선 쿠팡 조셉 대표, 20대 과로사 직원에 “사죄”). 쿠팡은 2021년 2월 고 장덕준 씨가 산업재해로 인정된다는 근로복지공단 판단이 나온 뒤 장 씨의 과로사를 인정하고 사과했다(관련 기사 [단독] 쿠팡 노동자 고 장덕준 씨 산재 인정, 사측 첫 공식 사과).
강은미 의원은 “화재를 수습할 책임이 있는 쿠팡은 같은 날 김범석 창업자가 사내이사직을 내려놨다는 입장을 냈고, 배송에 차질이 없게끔 하겠다는 말만 했다”며 “화재가 발생한 뒤 쿠팡이 보인 대처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강 의원은 “그 이전에 사내이사직 사임을 결정했고, 당일 발표할 계획을 세웠더라도 큰 사고가 터졌다면 발표를 미루는 것이 상식적”이라며 “먼저 사고 수습을 하고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유독 물질에 피해 입을 지역 주민들에게 가장 먼저 사과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쿠팡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가 발생한 건 6월 17일 오전 5시 20분이었다. 소방당국은 인력 150여 명, 장비 60여 대를 동원해 큰불을 잡았지만 오전 11시 50분쯤 내부 불길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그 사이 건물 내부 수색을 하던 소방관이 급히 탈출했는데, 김동식 구조대장은 주변에서 쏟아진 선반과 물건에 고립돼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비슷한 시각 쿠팡은 김범석 창업자가 국내 모든 직을 내려놓았다고 발표했다. 또 쿠팡 관계자는 언론에 “불이 난 센터는 당장 운영할 수 없는 만큼 고객 상품 배송에 어느 정도 차질이 예상되지만 다른 센터에서 배송을 나눠맡는 등의 방법으로 고객 피해를 최소화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안일한 대처를 두고 여론이 악화하자 쿠팡은 사고 발생 32시간 정도 지난 6월 18일 오후 3시쯤 강한승 대표 명의의 입장문을 내 “물류센터 화재로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 화재로 피해를 본 많은 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모든 쿠팡 구성원들의 마음을 모아 조속한 구조를 간절히 기원한다. 화재 원인 조사는 물론 사고를 수습하는 모든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다.
6월 19일 오후 12시 10분 사고 발생 56시간 만에 김동식 구조대장 시신이 수습됐다. 정치권과 시민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마음이 아프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께 마음 깊이 위로를 전한다”며 “재발 방지 대책을 포함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쿠팡을 향한 비난 여론은 계속됐다. 소셜미디어(SNS)에선 쿠팡 탈퇴 인증 글이 올라오고, 불매운동 조짐이 계속됐다. 쿠팡은 같은 날 오후 임직원 명의의 입장문을 내고 애도를 표했다. 이어 강한승 대표는 김 구조대장 빈소를 찾았다. 강 대표는 김 구조대장 유가족을 평생 지원하고 ‘김동식 장학기금’을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전히 비난 여론이 사그라지지 않자 김범석 창업자 또한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강 의원은 “쿠팡이 고 김동식 구조대장 유가족을 평생 지원하겠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매운동을 막아보려는 조치라고밖에 볼 수 없다”며 “사망한 9명의 노동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진정성을 못 느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강 의원은 “‘하청업체 직원이라서’ ‘개인적인 질병이 있어서’ ‘과중한 업무가 아니라서’라는 말로 쿠팡은 죽은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다”며 “지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강 의원은 “김 구조대장 빈소를 방문하고 왔는데 가족들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웠다”며 “유가족과 그를 두고 먼저 빠져나온 동료 등 수많은 사람들이 겪을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대기업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다시 실감하게 된다”고 전했다.
김범석 창업자가 국내 사내이사직을 내려둔 것을 두고 2022년 1월 1일 시행하는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인한 책임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김 창업자는 국내 경영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중대재해처벌법의 처벌 대상에서 빠졌다. 쿠팡은 올해 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증권신고서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기업 경영의 주요 리스크라고 기재한 바 있다.
김 창업자는 앞서 5월 미국 국적임을 내세워 공시대상 기업집단의 총수(동일인) 지정을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창업자는 여전히 쿠팡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김 창업자는 한국 쿠팡 지분 100%를 보유한 미국 상장법인 쿠팡 아이엔씨(Inc.)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한다. 쿠팡 아이엔씨 의결권 76.7%도 갖고 있다. 이에 쿠팡은 김 창업자가 해외 사업에 집중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강 의원은 “꼼수라고 본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중대재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는 게 맞지만 김 창업자는 이를 피해 달아났다”며 “쿠팡은 애초에 설계 자체가 소위 노동자를 갈아 넣을 수밖에 없도록 돼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강 의원은 “사람은 10년, 20년 버틸 수 있는 강도로 일해야 하는데 쿠팡은 노동자가 옆에 있는 사람과 경쟁하도록 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모든 힘을 쏟도록 만든다”며 “노동 사고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강 의원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령 강화와 법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강 의원은 “실질적인 지배자가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서라도 앞으로 이런 사태를 막을 생각”이라면서도 “다만 법 시행이 내년 1월 1일이기 때문에 지금은 시행령을 강화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강 의원은 “필요한 안전 설비를 갖췄는지, 예산을 확보했는지 등 경영책임자의 안전 의무 조치를 구체적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강 의원은 정치권 자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강 의원은 “정의당은 물론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도 구의역 사고 때 빈소를 방문해 재발 방지 약속을 했고, 고 김용균 노동자 사망 당시에도 빈소를 방문해서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며 “그림이 되는 곳에 방문해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화재 초기 스프링클러가 꺼져 있어 8분 동안 작동하지 않은 것을 두고선 강 의원은 “소방법 위반은 매우 엄중한 사안”이라며 “평소 오작동이 잦아 누군가 일부러 꺼둔 것이라고 밝혀진다면 명확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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