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말 검찰에 소환된 김경준 씨. |
정치권 안팎에서는 애초부터 제기됐던 ‘빅딜설’ ‘물청소설’ 의혹과 함께 이번 수사 역시 용두사미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면서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결국 의혹은 있지만 실체는 없는 ‘미제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와중에 2007년 대선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김경준 기획입국설’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또 다른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기획입국설을 뒷받침했던 편지가 조작됐다고 주장하고 있는 인물이 이 사건에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개입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분위기다.
여권 핵심실세가 개입된 정치공작 사건으로 비화될 조짐이 일고 있는 ‘김경준 기획입국’ 조작설의 내막을 추적해봤다.
‘김경준 기획입국설’은 2007년 BBK 사건의 주역인 김경준 씨가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의 회유로 입국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여권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치명타를 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BBK 의혹을 제기한 김 씨의 송환을 의도적으로 기획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김 씨의 수감동료인 신경화 씨의 편지를 증거로 내밀며 BBK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나의 동료 경준에게’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이곳에 와보니 자네와 많이 고민하고 의논했던 일들이 확실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큰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고…”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는 2007년 김 씨가 입국하게 된 배경에 ‘큰집’ 즉 당시 집권여당이 개입했으며 모종의 ‘딜’이 있었다는 심증을 이끌어냈다. 또 ‘여권 고위 관계자가 김 씨를 면회했다’는 미국 LA구치소 수감자의 증언 녹취CD까지 공개된 데 이어 2008년 3월 김경준 씨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신경화 씨가 “김 씨 입국에 정치권과 국정원이 개입했다”고 진술해 당시 집권 여당의 기획입국설에 더욱 힘이 실렸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은 신 씨의 편지를 물증으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검찰은 2008년 6월 3일 “김경준 씨의 입국에 정치권이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며 사건 관계자들을 무혐의 처분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최근 BBK 사건의 열쇠를 쥔 키맨들이 잇따라 귀국하면서 진실게임이 재점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경화 씨의 편지 자체가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신경화 씨의 동생 신명 씨는 “형이 김경준 씨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편지는 형이 쓴 게 아니라 내가 작성했다”고 밝혀 논란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편지작성 경위에 대해 신 씨는 “당시 형을 살려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형(신경화) 이름으로 편지를 써주면 감형 및 미국 이송 등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신 씨는 “편지를 날조하게 한 인물이 돈을 빌려주고 보증도 서줬으나 이후 사람을 시켜 그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고 폭로했다. 신 씨의 이번 주장은 2007년 당시 여권의 ‘김경준 기획입국’ 의혹을 제기했던 한나라당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어서 상당한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의 핵심은 신명 씨에게 편지를 쓰도록 회유한 인물이 과연 누구인가로 집약된다. 신 씨의 편지 대필 발언이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문제의 편지가 조작되는 과정에 이명박 대통령과 그 측근이 개입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씨는 명예훼손 및 정치적인 파장 등을 고려해 정확한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편지조작을 강요한 인사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 가족’ ‘한나라당과 연계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편지조작을 제안한 것은 MB 가족이다. 직접 내가 본 적은 없지만 사건을 진두지휘했다. 중간에 두 사람이 더 개입했다” “그 사람이 배후에 ‘누가 있다’고 수십 차례 얘기했다. 내 앞에서 배후세력과 통화도 여러 차례 했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했다. 이쯤되면 이름 석자를 직접 거론하지만 않았을 뿐 사실상 특정인들을 지목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현 여권 핵심실세인 A 의원과 현직 고위관료 B 씨 등이 신 씨가 언급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다.
두 사람은 현 정권을 탄생시키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고, B 씨의 경우 언론플레이를 하고 입을 막는 역할을 했다는 구체적인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로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3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친이계 핵심인 A 의원, 현직 고위관료인 B 씨가 관여됐다. 정부 고위관료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할 정도의 직위”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과연 신 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편지조작을 회유한 인물은 대체 누구일까. 현재 신 씨는 “편지를 쓰라고 강요한 세력을 차기총선이나 다음 대선 전에는 밝히겠다”며 한발 물러선 상태다. 신 씨는 “대통령 임기가 2년이 아닌 1년만 남았어도 청문회 하는데 가서 떠들고 싶다”며 더 이상의 추가 폭로에 대한 부담감을 표하고 있다. 다만 신 씨는 “그 사람이 내게 가지고 왔던 편지 내용, 검찰 수사 대처 방법 등의 문건을 3곳에 분산 보관하고 있다”며 편지 조작을 입증할 증거가 충분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경준 기획입국’ 조작에 여권 실세와 한나라당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커지자 정치권은 크게 술렁이고 있다. 야권에서는 원점에서 재수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민주당은 ‘BBK 김경준 검찰수사 대책반’을 구성하는 등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
신 씨의 주장대로 현 여권 실세가 편지 조작을 제안한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한나라당으로서는 치졸한 선거전략을 펼쳤다는 맹비난과 함께 도덕적으로도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검찰은 “증거로 제출된 편지가 조작됐다는 내용을 알고 있었고 이는 당시 수사결과에도 포함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조작된 편지를 물증으로 내세워 수사의뢰를 했던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특별한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이와 관련된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검찰은 조작된 편지를 4년 뒤에야 신명 씨에게 되돌려줬고, 문제의 편지가 조작된 정황을 포착해 내사를 하고도 형사처벌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배경을 둘러싼 또 다른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이와 관련 검찰은 “‘편지를 쓰라고 시킨 사람이 없다’는 신명 씨의 진술이 있었기 때문에 따로 수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기획입국설’에 대한 허술한 수사정황이 드러난 이상 검찰은 권력을 의식한 편향수사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편지 조작설이 불거지자 가장 좌불안석인 곳은 청와대다. BBK 사건의 또다른 핵심 당사자인 에리카 김의 자백이 이 대통령 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상황에서 신명 씨의 이번 폭로는 꺼져가던 BBK 사건에 또다시 불씨를 지피는 뇌관으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신 씨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2007년 대선을 앞두고 MB일가-측근-한나라당이 정치 공작을 자행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쯤되면 정권말기 침출수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그냥 흘려들을 것만은 아닌 듯하다.
과연 당시 MB캠프는 정권을 잡기 위해 치졸한 공작과 모략을 감행했던 것일까. 청와대가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BBK 사건을 둘러싼 또 다른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