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9일 대전시티즌과 현대오일뱅크의 경기에서 선취골을 넣은 대전 황진산 선수가 프로축구 승부조작과 관련해 팬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2008년 아마추어 격인 K3리그에 이어 실업축구 내셔널리그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넘어갈 만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한국 축구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프로축구 K리그에까지 승부조작 여파가 밀려들면서 축구계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선수들은 동요했다. 그들 스스로가 불법 행위에 관여한 가담자였고 동료들에 악영향을 끼치는 가해자였지만 최대 피해자이기도 했다. 애써 태연한 듯해도 속내는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서로를 믿지 않은 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이러한 기류는 고스란히 각급 대표팀으로 이어졌다. 6월 3일과 7일, 2차례 A매치를 위해 파주NFC에 소집된 국가대표팀은 평소처럼 왁자지껄하고 떠들썩한 소란 대신 고요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대로라면 온갖 스포트라이트가 모아졌겠지만 상황이 달랐다.
대표팀을 커버하는 취재진 숫자도 대폭 줄었다. 인력 및 업무 분배가 각 신문, 방송사별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일부 매체들은 아예 메이저 스포츠 이벤트를 취재할 때처럼 특별취재단까지 구성해 승부조작 및 불법 베팅 문제를 집중 보도하고 있다.
선수 개개인의 인터뷰 주제도 대개 K리그를 뒤흔들고 있는 승부조작과 관련된, 조금은 민감한 내용들로 모아졌다. “내가 (승부조작에 가담) 한 적은 없다”며 강하게 부인하는 선수들의 얼굴에서는 머쓱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대신 “불법 베팅과 승부조작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짓말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하필 대표팀 조광래호가 소집된 당일, 프로축구연맹이 주최한 K리그 전 구단 특별 워크숍이 1박2일간 열려 파주NFC 기자실의 썰렁함은 더했다.
고 정종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것도 연맹 정몽규 총재의 특별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를 즈음해서였다. “다시는 불법 행위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뿌리 뽑겠다”는 내용의 정 총재 인터뷰는 “내가 승부조작에 직접 가담했고, 동료들에게 행위를 시켰다”던 고 정종관의 유서 내용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일부 축구 팬들은 “영원히 기억될 희대의 코미디”라며 비웃었다.
비슷한 시기에 2012 런던올림픽 아시아 2차 예선을 준비하며 강릉에 소집돼 있던 올림픽 홍명보호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각급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도 상황에 촉각을 기울이며 연루 선수들이 선발되지 않았기를 희망하는 분위기였다. 축구인들뿐 아니라 아는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아는 정보 없느냐”며 묻기도 했다.
조 감독은 “모든 걸 발본색원해야 한다. 비양심적인 일부 탓에 축구판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각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현태 골키퍼 코치도 “희망을 주고, 스트레스를 푸는 계기가 돼야 할 축구가 오히려 국민적인 스트레스를 증폭시키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지만 정확하게 나올 수가 없다.
현재로서 유일한 답은 불법 행위 가담 선수들의 양심 고백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시선이 공존한다.
한 에이전트는 “희생자가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감히 누가 입을 열겠으며 누가 동조자들을 말하려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소문대로 조폭들이 승부조작 사태에 깊숙이 개입했는데, 살해 협박과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어떻게 고백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 작년부터 조폭에게 끌려가 엄청나게 맞고 숙소로 복귀했다는 선수들 얘기가 자주 들려오고 있고, 한 실업축구 구단의 경우는 단체로 조폭과 대면했다는 소문도 나온다.
실제로 김동현 선수는 브로커와 맺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조직폭력배에게 얻어맞고 돌아온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폭과 선수들의 연계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많은 얘기들이 나돌았다. 유흥가를 관장하고 있는 조폭들이 축구대회나 운동회를 열 때면 프로선수들 일부가 자주 참석했다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여기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스타급 선수들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조폭이 프로선수 혹은 지도자에게 용돈을 줬다’든지 ‘조폭과 아무개 선수가 형 아우 하는 사이’라는 얘기는 사실 단순한 뜬소문만은 아니라는 게 스포츠계의 정설이다. 실제로 조폭 보스와 스포츠선수 혹은 지도자가 고급 술집에서 대작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가 한두 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승부조작과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조폭과 스포츠 선수들이 평소에 친분을 유지해왔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와 관련 모 구단 선수와 자주 만난다는 한 관계자는 자신이 아는 선수도 사전정보를 인지하고 베팅을 한 적이 있음을 털어놨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그 선수는 브로커 혹은 조폭과 관련돼 정보들을 접하면서 승부조작 정보를 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거의 시민구단들이 대상이라고 해도 축구계에서는 고액 연봉자는 ‘심심풀이로 재미삼아’ 하는 경우가, 연습생 및 2군 등 수입이 적은 선수들은 ‘생계 수단’으로 승부조작을 위한 검은 돈 놀이를 했다는 루머가 파다해 대기업을 등에 업은 빅 클럽들도 해당될 수 있다.
물론 어쩌면 구단 프런트와 감독 등 코칭스태프도 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대개가 쉬쉬하며 그냥 묵인하는 분위기였기에 먼저 총대를 메고 나서기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또한 이 같은 사실을 먼저 들고 공론화할 경우 빗발치는 여론의 비판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의혹은 넘치지만 지금까지도 “우린 그런 선수들이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구단들도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해당 팀 사령탑들은 “그런 불법 행위들은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게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불법 행위 가담 혐의가 있어 이적하려다 실패했던 전력이 있는 선수들은 버젓이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각 구단들이 주고 받는다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영입 불가 선수 리스트’ 존재에 대해서도 몇몇 감독들은 “대체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요즘 난무하는 소문들에 대해서도 일부 팬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굳이 루머만으로 의혹을 들춰내면 뭐하느냐”고 날을 세우지만 ‘모두 한통속’ 혹은 ‘혹시, 너도?’ 등등의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루머까지 세세히 공론화하고 명확히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떠들썩한 K리그 승부조작은 처음 시작이 루머였지만 이젠 진짜 현실로 다가왔다는 걸 무시할 수 없다.
K리그의 캐치프레이즈 ‘열정의 놀이터’는 점차 진흙탕으로 빠져들고 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정’으로 ‘돈’으로 굴비 엮었다
이미 <일요신문>은 지난호 지면을 통해 승부조작과 불법 베팅 등 개괄적인 메커니즘을 소개한 바 있다.
실제로 이번에 불거진 사태는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살필 수 있다. 무엇보다 국내냐, 해외냐가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상주 상무 소속 스트라이커 김동현이 연루된 것은 전자의 경우이고 후자는 중국 등 국외에 베이스를 둔 불법 베팅 업체를 통한 승부조작이다.
물론 처음 들어보는 생뚱맞은 게 아닌, 축구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통하고 있던, 또한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들이다.
김동현 건의 경우는 선수들이 직접 브로커가 돼 동료들을 포섭 매수해 행위에 가담했다는 정황을 곳곳에서 포착할 수 있었다. 고 정종관이 여기에 연루돼 있다.
최근 창원지검에서는 합법적인 스포츠 복권에서 불법 고액 배당금을 챙기기 위해 승부를 조작한 혐의가 있는 대전과 광주 선수들과 브로커 2명을 구속했다. 고 정종관은 브로커와 다른 선수들을 연결해주는 중계 역할을 한 혐의만 확인된 상황이다.
그러나 브로커 두 명 중 한 명은 경남FC에서 작년까지 현역으로 활약했고, 또 다른 나머지는 학창 시절(고교)까지 축구화를 신었던 인물이다. 여기에 학맥과 인맥이 총동원돼 선수들이 굴비처럼 엮였다.
여러 가지 소문들도 무성하다. 심지어 브로커 중 한 명은 아예 과거 조직폭력배 활동을 해왔다고 알려졌다. 실제로 큰 돈을 끌어들여 동료 선수들을 매수한 점, 이미 작년 시즌 후반기부터 승부조작에 조폭이 개입돼 있다는 정황과 루머들이 나온 터라 진짜 ‘잡아넣어야 할’ 배후 세력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확언할 수 없으나 검찰이 대전과 광주에 한해 수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최초 발표를 뒤집고 수사 인력을 보강, 축구판 전체로 확대되는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정치권과 축구계 최고위층이 연루돼 수사가 얼마 안 있어 마무리될 것이란 분석도 내놓는다.
대전과 브로커에 받은 돈 1억 원 가량을 동료들에게 제대로 뿌리지 못한 선수를 보유했던 광주를 제외하고도 대부분의 구단들은 “우린 안 했다”며 안심하는 게 아니라 “혹시나”하며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앞서 거론된 구단들 외에도 포항 베테랑 미드필더 김정겸이 승부조작에 대한 결과를 미리 알고 가족을 통해 1000만 원을 합법인 스포츠토토 프로토(2경기 이상 승무패를 알아맞히는 방식)에 베팅을 해 2000만 원을 딴 사실이 밝혀져 팀에서 방출됐을 뿐 아니라 검찰 조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전북 현대 멤버 3명이 이번 승부조작 사태에 깊숙이 연루됐던 골키퍼 성 아무개와 친하게 지내고 몇 차례 개인적인 자리와 돈 거래를 한 사실이 알려져 일부 의혹도 불거졌다. 시점도 절묘해 정종관의 자살은 프로연맹 정몽규 총재의 “불법행위 근절” 공식 기자회견 이후, 김정겸 사태는 ‘승부조작 대책 마련’ 특별 K리그 워크숍 이후 벌어져 충격은 더했다. 특히 김정겸처럼 스포츠토토에 베팅했던 경험을 지닌 선수들은 꽤 있는 것으로 알려진 탓에 후폭풍은 엄청날 전망이다.
그렇다면 해외의 경우는 어떠할까. 대개가 중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 지역 세력이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소문이다. 신분 밝히기를 꺼리며 언론사에 연락을 간혹 취해오는 제보자들도 엇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 신빙성을 더한다. 일각에서는 국내의 IP주소를 해외로 바꿔 불법 행위에 가담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여기에 연루된 선수들의 실명까지 이미 파다한 상황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다. 뚜렷한 물증이 없다. 그래서 고민이 크다는 축구 관계자들의 코멘트들도 여기서 나온다. 부정적이지만 한바탕 소란이 일고 나면 금세 잊혀질 것이란 말도 무성하다.
익명을 요구한 연맹의 한 직원은 “K리그 전체가 합심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불거진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지만 심증만으로 가담자로 몰아세울 수도 없는 데다 수사 권한도 없으니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고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