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당의 국정원장’이라는 닉네임이 잘 어울리는 정형근 의 원. | ||
국회는 정 의원의 폭로로 또다시 파행운영되고 있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청와대와 국정원이 뒤얽혀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 대선을 50여 일 앞두고 터진 정 의원의 도청 폭로에 숱한 뒷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치권에는 과연 정 의원의 폭로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 의원이 주장하는 국정원 도청자료가 사실인지에 대한 무수한 관측이 떠돌고 있다.
정 의원이 국정원 도청자료를 공식적으로 거론한 것은 지금까지 세 번이다. 정 의원은 지난 9월24일 금감위 국정감사에서 대한생명 매각에 청와대와 민주당 등 여권실세들이 개입됐다며 한화 김승연 회장과 김연배 사장과의 지난 5월 통화를 도청한 자료를 공개했다.
정 의원은 이어 지난 4일 금감위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박지원 비서실장과 요시다 다케시 신일본산업 사장 사이에 오간 대북사업 관련 통화내용을 폭로했다. 정 의원은 한동안 폭로를 자제하다 지난 24일 국회 정무위에서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대북 4억달러 비밀지원 의혹 수사와 관련, 최근 대검찰청 이귀남 정보기획관과 통화한 내용을 공개했다.
세 차례에 걸친 정 의원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한마디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국정원이 청와대와 민주당의 권력실세는 물론 금감위원장, 검찰 고위간부 그리고 재벌 총수 등에 이르기까지 ‘요인’들의 통화내용을 광범위하게 도청하고 있다는 엄청난 내용 때문이다. 또 이같은 도청자료가 국정원 내부직원으로부터 야당의원에 흘러나와 국회를 통해 폭로됐다는 점도 정치권을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흡사 첩보영화를 보는 착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세분석과 폭로를 통한 여권 공격에 동물적 감각을 지닌 정 의원이 자칫하면 정치적 생명을 잃게될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연쇄폭로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에서는 정 의원이 집권말 여권내부 교란, 이회창 지지자들에 대한 도청 경고 등 두 마리 토끼몰이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국정원 검찰 경찰 금감원 등에 도사리고 있는 내부고발자들의 협조를 부추기는 부수효과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김대중 정권에 도덕적 타격을 입히면서 레임덕 현상을 가속화시켜 여권 내부를 교란, 전열을 흐뜨리는 동시에 권력핵심에 우리편이 많다는 것을 과시해 대세론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대선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정 의원의 도청자료 폭로로 여권 내부는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특히 청와대와 민주당, 그리고 권력기관의 핵심인사들이 도청 공포에 떨고 있다. 권력 내부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정 의원은 무엇보다도 이를 노렸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대선을 앞두고 권력기관에 ‘도청 괴담’을 흘림으로써 여권내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차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국정원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내부감찰이 강화되면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전했다. 대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국정원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정 의원의 1차 목표였다는 말도 들리고 있다.
정 의원의 폭로를 바탕으로 언론이 도청문제를 연일 쟁점화시켜 현 정부의 도덕성이 도마위에 올랐다. 정치권 인사들이 휴대전화를 대여섯 개씩 가지고 다니고, 심지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조차 얼마전 특수제작된 비화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국정원이 도청을 하고 있는지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불법도청, 정치사찰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정 의원의 폭로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라는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 신건 국정원장 | ||
정 의원은 이와 함께 폭로를 통해 권력기관 내부고발자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관측이다. 국정원 직원이 도청자료까지 한나라당에 제보를 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해 내부고발자들을 안심시키려는 고도의 심리전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정 의원이 폭로한 도청자료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정 의원은 세 차례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자료의 출처, 유출 경로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도청자료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 의원이 국정원 출신 직원들로 구성된 전략기획팀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팀이 과거 도청 경험을 바탕으로 자료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정 의원은 “국정원 도청은 보안유지를 위해 문서로 남기지 않고 컴퓨터에만 보관중이며, 국정원장에 보고할 때 손으로 써서 보고서를 만든다”면서 “양심있는 국정원 간부로부터 직접 자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자신의 폭로에 대한 의혹이 커지자 지난 25일 중앙일간지 아무개 중견기자가 지난 3월 초순 한나라당 K, S의원과 통화한 도청자료를 해당기자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건 국정원장은 지난 25일 국회 정보위에서 도청을 강력히 부인했다. 신 원장은 정보위원들에게 감사원과 정보통신부의 인력과 장비를 지원받아 국정원 현장검증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신 원장은 “최근 감청업무를 담당하는 8국(과학보안국)을 해체했다”고 밝혔다. 신 원장은 “만약 도청설이 근거없는 것이라면 그런 사실을 주장한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며 정 의원을 겨냥했다. 국정원은 이와 함께 “국정원이 휴대전화를 도청할 수 있는 첨단장비를 50대로 늘려 정관계 주요인사들에 대해 도청을 해왔다”고 보도한 <동아일보>에 대해 형사소송은 물론 거액의 민사소송을 준비중이다.
물론 정 의원이 폭로한 도청자료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통화내용을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이귀남 대검 정보기획관과의 통화사실은 인정했지만 대화 내용은 전혀 다르다고 밝혔다.
정 의원이 조만간 도청에 대한 또 다른 폭로를 준비하고 있어 도청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재로서는 신건 국정원장과 야당의 국정원장으로 불리는 정 의원의 거짓말 게임 양상이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도 정치공작과 폭로로 얼룩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의 추가 폭로 내용과 국정원의 향후 대응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려 있다.
김일송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