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이른바 ‘월드컵 휘장 게이트’의 실체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일요신문>은 핵심 로비스트의 한 사람인 G사 S대표(구속)의 ‘접촉 대상’을 가늠할 수 있는 개인 전화번호 수첩(사본)을 입수했다.
이 수첩에는 청와대, 정·관계, 검찰, 경찰 등 상당수 권력기관 인사들의 이름이 사무실과 자택 전화번호, 그리고 휴대폰 번호와 함께 기재돼 있다. 그중에는 김홍일 민주당 의원,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 거물들도 포함돼 있어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정치권 전반에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로비의 천재다.”
지난 5월18일 월드컵 휘장사업자 S씨가 검찰에 구속됐을 때 S씨와 함께 사업을 추진한 측근 K씨의 평가다. K씨는 또한 “로비에서는 이겼지만 사업에선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사실 월드컵 휘장사업은 로비로 인해 사업주체가 여러 번 바뀌었다. 지난해 월드컵대회를 앞두고 휘장사업자로 선정되기 위한 업체 간 경쟁은 치열했다. 2000년 당시 휘장사업 규모가 5천억원에 달한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대기업 2∼3개를 포함해 10여 개 중소기업이 경쟁에 참여한 것.
그 결과 사업권자로 낙점된 회사는 CPP코리아(FIFA의 마케팅 대행사인 ISL이 설립한 영국 CPLG와 홍콩의 완구제조업체 PPW 합작법인)였다. 그러나 CPP코리아는 사업 추진에 역풍을 맞게 됐다. 국내에서 열리는 월드컵 행사의 사업 수익을 외국계 회사가 맡게 된 것에 대한 비난 여론에 직면한 것.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CPP코리아 김철우 전 사장은 사업이 위기에 직면하자 정·관계 로비를 통해 이를 돌파하려 했다고 한다. 이때 영입한 인물이 은행장 출신으로 정·관계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김재기 회장.
김 회장은 D대학 동창회 부회장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K씨에게 로비를 했고, H씨에겐 다른 의원을 통해 접근했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홍일 의원에게는 김 전 사장이 직접 나섰지만 김 의원이 거부해 도중에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CPP코리아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휘장사업권은 2001년 12월 코오롱TNS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로비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은 코오롱TNS 이동보 회장과 코오롱TNS와 함께 휘장사업을 추진했던 G사 S대표, CPP코리아 회장을 역임했던 김재기 회장(코오롱TNS월드 회장 역임)이다. 그중에서도 S씨가 로비의 핵심이라는 게 검찰과 당시 사업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이 주 로비 대상으로 삼은 곳은 권력실세와 청와대, 월드컵조직위원회 등이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S씨의 ‘전화수첩’이다. 이 수첩에는 정·관계 인사는 물론 법조계, 재계 인사를 망라한 2백69명의 명단이 근무처(직책), 각종 전화번호와 함께 자세히 적혀 있다.
대체 이런 거물들의 이름이 S씨의 수첩에 기록돼 있던 까닭은 무엇일까. S씨와 함께 사업을 추진했던 K씨는 S씨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고 전했다.
K씨에 따르면 CPP코리아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실세로 알려진 K·H씨에게 선을 댔기 때문에 ‘전세’를 역전시키려던 코오롱TNS와 G사 입장에서는 그들과 견줄 만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접촉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K씨는 S씨가 워낙 은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실제 S씨가 김 의원 등에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로비를 벌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의원측은 S씨와 연관시키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 의원과 함께 S씨의 수첩에 이름이 올라 있는 이아무개 보좌관은 S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며 “그럼 나도 로비대상이냐”고 반문했다.
S씨의 수첩에 이름이 기록된 JP측 역시 비슷한 반응을 나타냈다. JP측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입장이다. 한 측근인사는 “돈벌이에 눈이 먼 사람들이 누구든 안팔겠느냐”며 “그런데 하필 왜 JP냐”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S씨의 수첩에 등장하는 전·현직 의원들 중 상당수도 S씨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S씨가 개인 전화수첩에 이들 정치권 인사들의 이름을 올려놨던 까닭은 무엇일까.
일단 S씨가 로비할 대상을 총망라해 기록해 놓았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수첩에 사무실뿐만 아니라 자택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S씨가 나름대로 ‘준비’를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는 시각이다.
전화번호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정치권 인사들의 도움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S씨가 수첩 속의 인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로비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짚어볼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S씨가 전화번호 수첩을 ‘로비스트의 훈장’처럼 활용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즉 하부 로비과정에서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기 위해 영향력있는 인사들의 이름을 수첩에 올려놓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S씨의 전화수첩에 얽힌 ‘진실’은 앞으로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이 S씨의 수첩에 오른 인사들을 차례로 소환해 조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혹이 실체로 드러날 경우 소환 대상자의 ‘급수’도 차츰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과연 S씨의 수첩 속 명단이 로비의혹 수사에서 ‘유의미’한 것인지 아니면 전혀 무관한 것인지 정치권은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