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베로 감독 ‘마지막 타석’ 통보에 멍, 열흘간 번민…19년 동안 문제 없이 달려왔고 이성열답게 마무리”
그러나 이성열의 타석은 거기까지였다. 선수생활도 그 타석을 끝으로 마무리 지었다. 만루포로 동점을 만들고 더그아웃으로 향한 이성열은 갑자기 수베로 감독의 호출을 받고 감독실로 향했다가 그 자리에서 “이 타석이 선수로서 마지막 타석이다”란 감독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이후 열흘가량 고민을 거듭하던 이성열은 구단에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최종 통보했고, 8월 28일 한화는 이성열이 19년 프로 생활을 마무리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통해 이성열의 은퇴를 공식 발표한다. 은퇴 후 잔여 시즌 동안 2군에서 전력분석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성열. 충남 서산으로 출근하기 전날 서울에서 이성열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현역 선수가 마지막 타석을 만루홈런으로 장식한 후 바로 은퇴한다는 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스토리다. 은퇴를 결정하기까지 쉽진 않았을 것 같다.
“구단에서 공식 발표하기 전까진 은퇴하는 게 몹시 아쉬웠는데 발표 후 팬들의 반응과 여론을 보니 이성열답게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19년 동안 큰 부상 없이, 별다른 문제없이 잘 달려왔다. 은퇴를 하고 보니 처음 마음먹기가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잘 흘러가더라. 내 선수생활은 여기까지였다. 딱 좋을 때 떠나는 것 같다.”
―누구보다 가족들이 가장 마음 아파했을 텐데.
“아내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좀 힘들어하셨다. 어린 아들들이 나랑 같이 놀다가도 '아빠, 왜 야구장 안 가?'라고 묻는다. 8월 14일 만루홈런 치고 경기 후 아내와 통화 후 다음날 아침 아버지께 전화드렸는데 처음에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 시간이 지나자 아들의 마지막 경기를 야구장에서 직접 못 보신 게 많이 아쉬우셨던 모양이다. 사실 올 시즌 마치면 은퇴 여부를 놓고 고민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즌 중 은퇴하리라곤 전혀 예상 못했다. 아버지 입장에선 아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8월 14일 NC와 경기 전 은퇴 사실을 알고 뛴 건가.
“모르고 경기에 임했다. 만약 사전에 감독님이 귀띔하셨다면 만루홈런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경기라는 걸 알고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경기에 집중해서 만루홈런을 때릴 가능성은 극히 낮으니까. 당시 만루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에 들어갔더니 감독님이 방으로 부르시더라. 경기 중 나를 호출할 정도로 무슨 급한 일이 있나? 전날 후배들을 다그쳤던 내 모습이 보기 싫었나? 하는 복잡한 생각으로 감독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통역을 통해 '이번 타석이 너의 마지막 타석이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어? 이게 뭐지?’ 싶었다. 서운함을 느낄 겨를 없이 그냥 멍했다. 속으로 ‘이게 마지막이었다고?’ ‘어떻게 이게 마지막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정)우람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때 우람이한테 내 상황을 말해줬다.”
―정우람 선수가 크게 놀랐겠다.
“내가 아까 만루홈런 친 게 선수생활의 마지막 타석이었다고 말하니까 많이 놀라더라. 우람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큰 짐을 안겨주고 떠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린 선수들과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상 없이, 지치지 말고 팀을 잘 끌어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이성열은 8월 14일부터 약 열흘간 번민의 시간을 가졌다고 말한다. 19년 선수생활을 마무리 짓는 순간이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올림픽 휴식기 동안 자신의 타격폼을 보완하려고 엄청난 훈련을 이어갔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내던지다시피 했던 훈련 과정 덕분에 만루홈런을 선물로 받았다며 애써 위안을 삼기도 했다.
―이후 공식적으로 은퇴 소식이 발표됐고, 그날 대전구장을 찾아 후배들과 인사 나누는 모습을 구단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후배들과 그라운드에서 인사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준 구단에 감사했다. 아무나 그런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선배들도 많이 봤기 때문에 후배들과 제대로 인사 나누게 돼 정말 흐뭇했다. 동생들에게 무거운 짐만 안겨주고 떠났다. 선배들이 내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듯이 나도 한화를 떠나며 더 큰 숙제를 남기고 왔다. LG 트윈스에서 처음 프로 생활을 시작해서 두산 베어스, 키움 히어로즈를 거쳐 한화에서 7년의 시간을 보냈다. 선수생활의 마지막 팀이고, 팀 성적 부진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터라 가장 기억에 남는 팀이 한화다. 가족들이 서울에서 생활하고 대전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야구장에 남들보다 일찍 출근한 것도 외로움을 잊고 싶어서였다. 야구장 나가면 선수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야구를 잘 할 때는 외로움도 기쁨인데 야구가 잘 안 될 때는 외로움이 두렵기도 하더라.”
―최근 한화의 팀 운영이 리빌딩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출전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못했다. 서운한 점은 없었나.
“어느 날부터 출근해서 라인업 카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내가 직접 보지 못하고 후배들한테 물어보기도 했다. 라인업 카드에 내 이름 있냐고. 선발 라인업 말고 하단에 있는 교체 멤버로 말이다. 나름 야구를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는데 올 시즌에는 자꾸 거짓으로 야구하는 것만 같았다. 야구가 잘 안되는데도 잘 되는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으로 하는 야구 말이다. 믿고 따랐던 선배들이 다 떠나면서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은 부분도 있다. 형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자책감이 나를 더 힘들게 몰아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을 만루홈런으로 장식하게 해줬으니까 말이다. 새삼 절감했다. 내가 야구를 버리지 않는다면 야구도 날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성열의 통산 홈런은 190개. 200개를 채우지 못하고 은퇴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한다. 인터뷰 말미에 이성열과 ‘홈런’과 관련된 질문을 이어갔다.
―데뷔 첫 홈런이 언제였는지 기억나나.
“당연하다. LG 시절인 2005년 5월 11일 불펜에서 포수로 투수들 공 잡아주다 코치님이 빨리 대타로 나가라고 말씀해주셔서 타석에 들어섰는데 상대팀이 한화였고, 투수가 지연규 코치님(NC)이었다. 지 코치님 공을 홈런을 만들면서 데뷔 첫 홈런을 장식할 수 있었다.”
―잊지 못할 백투백 홈런이 있다면?
“2010년 두산 시절 KIA 타이거즈와 개막전을 치렀는데 당시 김경문 감독님이 선발로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고영민 코치님이 2번, 내가 3번 지명타자였는데 고 코치님이 아킬리노 로페즈를 상대로 홈런을 날린 후 내가 바로 또 홈런을 치면서 백투백 홈런을 완성시켰다. 그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돌며 홈으로 들어오는데 순간 관중석에 앉아 계신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이 어디 앉아 계신지도 몰랐는데 그 많은 관중들 틈에 박수 치며 좋아하시는 부모님이 눈에 띈 것이다. 그날 3안타를 친 걸로 기억한다. 그해 두산에서 24홈런을 치는 등 성적이 좋았다. 백투백 홈런은 내가 지금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고 본다.”
―내 생애 최고의 끝내기 홈런은?
“2019년 6월 20일 대전 롯데전, 당시 한화가 7연패를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9회말 6-7로 뒤진 상황에서 롯데 박진형의 초구를 받아쳐 극적인 역전 좌월 만루포를 터트렸다. 프로 데뷔 후 첫 끝내기 역전 만루 홈런이었다. 팀의 7연패를 끊은 끝내기 홈런이라 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2루까진 별다른 감정이 안 들었는데 3루 베이스를 돌면서 조금씩 미소가 피어났다. 팀 주장으로서 제 역할을 해냈다는 안도감이었다.”
2003년 LG에 2차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입단한 이성열. 포수에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꾸는 등 데뷔 초에는 프로의 벽에 부딪쳐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한때 야구를 그만두고 고향인 전남 순천에 내려가 소를 키우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을까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그에게 “이성열에게 ‘소’란?”이라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내가 야구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다. 소를 팔아서 야구부 회비를 냈고, 소와 이별할 때마다 우리 가족이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나한테 소는 그냥 고마운 존재다.”
이성열은 2021년까지 19년을 프로에서 뛰며 통산 1506경기 타율 2할 5푼 3리 1047안타 190홈런 698타점의 성적을 남겼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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