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월 셀틱FC에 입단한 후 스코틀랜드리그에서 굴곡 많은 축구 인생을 경험한 기성용은 정신적으로 부쩍 성숙한 모습이었다. 이주연 프리랜서 |
―런던이랑 글라스고랑은 기온 차가 크네요. 런던은 봄과 여름을 오가는데, 여긴 아직도 겨울이에요.
▲스코틀랜드 날씨가 변덕이 심해요. 지난주엔 눈까지 내렸는걸요. 날씨가 추워서 더운 여름이 그리울 정도예요.
―외국 생활이 많이 힘들고 외로울 텐데 차두리 선수가 셀틱에 합류한 이후 삶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럼요. 두리 형의 존재가 저한테 큰 힘이 되고 있죠. 요즘 형수님이 출산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가셨거든요. 두리 형이랑 찰떡같이 붙어 지내요. 형이 요리를 잘해서 제가 매일 ‘빈대’ 붙는 셈이죠. 독일 경험이 많은 형이 여러 가지 조언도 해줘요. 천성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형 덕분에 제 삶도 많이 밝아진 것 같아요.
―차두리 선수 때문에 빨리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서요?
▲얼마나 가정적인데요. 딸 아인이는 제 애인이나 마찬가지예요(웃음). 형네 부부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관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쁘고 늘씬하고 지적인 여자도 좋지만, 무엇보다 친구 같은 아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절 응원하고 지지해주면서도 바른 길로 가지 않을 땐 따끔하게 지적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요.
―올 시즌 정신없는 스케줄을 소화했어요. 월드컵 이후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다 아시안컵까지 치르느라 체력적인 부담도 컸겠어요.
▲아시안컵 대표팀에 합류하기 전에 컨디션이 아주 좋았어요. 팀에서도 부상자들이 속출하면서 저한테 기회가 많이 주어졌고, 그 기회를 잘 살려내면서 감독님한테 인정을 받기 시작했거든요. 솔직히 아시안컵에 합류할 즈음에는 부담이 컸어요. 셀틱 입단 후 벤치 신세로만 머물다 너무나 힘들게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기회를 잡다보니 그걸 놓고 대표팀에 들어가기가 어렵더라고요. 막상 들어가보니 거긴 또 다른 세상이 기다렸어요. 여느 대표팀과는 달리 아시안컵 때는 경기 자체를 즐겼던 것 같아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아시안컵 이후 소속팀으로 돌아가선 또다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죠.
―잠시 지난 남아공월드컵 전의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사실 월드컵대표팀 최종 명단에 기성용 선수의 이름이 올랐을 때 찬반양론이 분분했었죠. 소속팀에서 거의 게임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경기 감각면에서 이견들이 있었어요.
▲잘 알고 있어요. 당시 제가 10경기 연속으로 게임을 뛰지 못했어요. 3개월여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마음 고생이 꽤 심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대표팀에 합류했는데 자꾸 눈치를 보게 됐어요. ‘해외파’라는 타이틀을 빼곤 도통 한 게 없잖아요. 허정무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냅다 받아들였지만 다른 선수들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훨씬 컸어요.
―여론도 기성용 선수의 월드컵 승선을 반기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3월 이전부터 게임을 뛰지 못한 선수를 굳이 왜 뽑느냐고 아우성들이었죠. 한편으론 그런 여론이 이해되면서도, 또 다른 마음으론 서운한 감정도 생기더라고요.
―남아공으로 떠나기 전까지도 제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어요. 누구보다 선수 자신의 부대낌이 심했을 거라고 짐작돼요.
▲대표팀 선수들한테 터놓고 고민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다들 긴장해 있는 상태라 마음 편히 제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더라고요. 혼자서만 끙끙 앓았어요. 사실 제가 월드컵 첫 경기였던 그리스전에서 그렇게 잘할 수 있을지 몰랐어요. 경기 시작부터 감이 좋은 게 선수들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그때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두 개나 성공시켜 제 자신조차 깜짝 놀랐어요(웃음). 더 이상 내려 갈 곳도 없고, 더 이상 욕먹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그냥 마음 편히, 하던 대로 하자고 주문을 외웠던 게 효과를 봤던 것 같아요. 그리스를 이겼을 때, 가슴 속으로 많이 울었어요.
―남아공월드컵에서 인터뷰했을 당시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 어떤 변화를 암시했었어요. 그때 셀틱을 떠날 생각이었던 건가요?
▲월드컵대표팀에 합류하기 전에 수차례 이 팀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갈등이 절 많이 괴롭혔었죠. 그때마다 아버지와 에이전트가 절 설득해 나갔어요. 월드컵 이후, 고민이 진짜 심했는데, 무엇보다 셀틱에서 절 다른 팀으로 팔 생각이 없었어요. 불면의 밤을 보내며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직 제 나이가 어리고, 1년 더 있는다고 해서 제 축구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고. 그래서 셀틱에 남기로 했던 거죠.
―그때 만약 K리그로 유턴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하겠어요.
▲올 시즌 개막 이후에도 3경기를 뛰지 못했어요. 그때 다시 갈등에 빠졌죠. 아직 이적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 솔직히 답이 없었습니다. 이겨내는 수밖에.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안 했어요.
―셀틱 감독이 기성용 선수의 어떤 점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을까요?
▲스코틀랜드 리그 자체가 상당히 투박해요. 선수들이 강하고 거친 플레이를 하는 편이죠. 감독님께선 저한테 ‘파이터’ 같은 모습을 원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전 K리그에서 그렇게 뛰질 않았잖아요. 지금은 어느 정도 감독님이 원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모습을 갖췄다고 생각하지만 ‘파이터’는 아직 안됐어요. 솔직히 파이터가 되기 위해 제가 갖고 있는 장점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주전보다는 후보나 교체 멤버로 투입되는 시간들이 많았어요. FC서울에선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었죠. 특히 셀틱의 주전 선수들이 부상을 당해야 기성용 선수한테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셀틱에서 배운 중요한 경험이라면 주전 선수들의 백업멤버들이 어떤 실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팀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부분입니다. 주전 선수가 부상당했을 때 백업멤버들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잖아요. 개인적으로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딱 기회가 주어지더라고요. 만약 그때 실망하고 포기해서 준비하지 못했더라면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 거예요. 그 덕분에 부상 선수가 복귀했는데도 계속 제가 주전으로 뛰었어요.
―다음 시즌에도 셀틱FC 선수로 뛰는 건가요?
▲일단 팀과 계약이 돼 있으니까 그대로 가는 건 맞겠죠. 하지만 다른 클럽에서 좋은 오퍼를 보내온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동안 여러 차례 이적설이 나돌았는데, 그중에서 ‘진짜’가 있었나요?
▲어느 팀이라고 말씀드리기 그렇고요, 저에 대해 관심이 있는 팀이 있다고는 들었어요. 아직 시즌이 안 끝났고 이적 시장이 8월까진 가기 때문에 정확한 건 저도 잘 몰라요. 사실 이적이란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그 다음 갈 수 있는 리그가 어디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아직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저는 어디서 뛰느냐보다, 어떻게 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솔직히 셀틱이란 팀이 한국 팬들한테는 그리 유명한 팀은 아니지만 영국에서는 잘 알려진 클럽이거든요. 개인적으로 프리미어리그의 하위권 팀보다는 셀틱이 더 좋은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해요. 스코틀랜드에서는 레인저스 팀과 함께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를 이루는 팀이고, 셀틱 선수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 선수들도 많아요. 레인저스와 경기를 벌일 때 선수들도 팬들도 사생결단하듯 싸워요. 정말 ‘어메이징’ 그 자체예요.
―가장 흔한 질문 하나 할게요. K리그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선수라면 누구나 해외 진출을 소원해요. ‘선배’로서 조언을 한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가장 중요한 건, 이적할 팀이 나한테 맞는 팀인지,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옮겨가는 게 맞는 일인지를 고민해야 해요. 하지만 외국에서 생활하는 건 축구 외적으로도 배우는 게 많아요. 죽을 때까지 축구 선수로 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인터뷰를 직접 해보니까 기성용 선수가 스코틀랜드에서 생활하며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정말 배운 게 많아요. 축구하면서 해볼 것, 안 해볼 것, 다 해봤어요. 게임에서 제외도 돼보고, 벤치에조차 못 앉아보고, 주전들 부상으로 어렵게 기회 잡아서 게임을 뛰기도 하고, 살벌한 라이벌전에 출전도 하고, 월드컵, 아시안컵도 뛰고…, 정말 파란만장했던 것 같아요.
―언론이나 여론에 대해 관심을 두는 편인가요?
▲제가 셀틱에 입단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 반응이, ‘도대체 프리미어리그도 아닌 리그에 뭐 하러 가느냐? 너한테 도움이 안 될 것이다’라고 말들 했어요. 그 사람들은 셀틱이란 팀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경기를 뛰지 못해 속앓이를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팀 매력 있어요. 사람들 비난과 칭찬에 일희일비할 시기는 지났어요. 지금은 별로 신경 안 쓰게 되더라고요.
―독일에 있는 구자철 선수와 자주 전화통화한다고 들었어요. 구자철 선수도 입단 후 격동기를 겪고 있는데, 많은 얘길 해주셨겠어요.
▲자기는 괜찮을 거라면서 자신만만해 하던 놈이 독일 간 지 2주 만에 전화해선 죽겠다고 하소연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야, 넌 게임이라도 뛰잖아. 벤치만 달구는 나한테 할 소리냐’라고 뭐라고 했었죠. 여기 애들은 운동장에서 실수하면 막 뭐라고 소리치거든요. 그런데 그게 운동장에서만 그래요. 운동장을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근하게 굴거든요. 자철이로선 그런 부분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자철이는 감독이 잘 챙겨주잖아요. 감독의 사랑을 받고 안 받고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져요 하하.
인터뷰 말미에 지난 아시안컵 한일전에서 논란이 됐던 기성용의 원숭이 세리머니에 대해 살짝 질문을 던졌다. 기성용은 주저없이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라고 시인했다. 경기 내내 일본 응원단의 자극적인 응원에 감정이 격해 있던 상황에서 욱 하는 마음에 순간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 “그 후 진짜 욕 많이 먹었어요. 깊이 반성했습니다. 축구 외적으로 좀 더 성숙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기성용은 유럽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을 비롯해 박주영, 이청용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과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유럽리그를 누비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것. 이번 시즌이 될지, 아니면 다음 시즌이 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더 높은 비상을 위해 셀틱에서 경험한 희비쌍곡선을 그라운드에서 고스란히 드러내 보일 게 분명하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