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모델·홍보대사·유튜버로 활동…MZ세대 놀이처럼 소통하며 지갑 열어
반면 수만 명의 SNS 팔로어를 거느리고 연간 10억 원에 이르는 광고 매출을 올리지만 절대로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는 스타가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이 스타는 나이를 먹지도 않고, 항상 전성기의 외모를 유지한다. 소속사의 관리에도 절대적으로 응한다. 터무니없게 보이는 일은 현재 일어나고 있다. AI(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버추얼 인플루언서(Virtual Influencer·가상 인플루언서)들이다.
#사람이 아니라고?
얼마 전 한 보험사 광고가 화제를 모았다. 이 광고 속에서 자연스럽게 춤을 추고 있는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다. 언뜻 봐서 사람인지, 그래픽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수준은 뛰어넘었다. 자세히 눈을 씻고 봐도 실제 존재하는 인물로 보기 십상이다. 로지는 이미 6만 명에 육박하는 SNS(소셜미디어) 팔로어를 확보하고 있고, 이 보험사 외에도 여러 회사의 광고를 섭렵했다.
로지 외에도 현재 여러 가상 인간이 모델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로지를 만든 싸이더스스튜디오엑스는 해외를 무대로 주로 활동하고 있는 디지털 기반 패션모델 ‘슈두(Shudu)’도 배출했다. 영국 출신 사진작가 캐머런 제임스 윌슨이 3D 이미지 처리 기술을 이용해 만든 슈두의 SNS 구독자는 21만 8000명(9월 13일 기준)에 이른다.
모델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홈쇼핑 시장에도 가상 인간이 등장했다. 롯데홈쇼핑은 자체 개발한 가상인물 루시를 전면에 내세웠다. LG전자의 경우 올해 1월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전시회인 ‘CES 2021’에서 가상 모델 ‘김래아’를 선보였다. 이들에게는 서사도 부여된다. 루시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으며, 모델이자 디자인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29세 여성이며, 김래아는 ‘미래에서 온 아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서울에 사는 23세 여성이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유튜브 시장까지 파고들었다. ‘버추얼 유튜버(Virtual YouTuber)’라 불리는 이들은 독립된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생방송을 진행한다. 실시간으로 채팅도 나누며 대중과 소통한다. 물론 유튜브 시청자들도 그들이 가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꺼이 소통하며 지갑을 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유튜브 분석사이트 플레이보드에 따르면, 2020년 전 세계 유튜브 슈퍼챗을 통해 가장 많은 후원금을 모은 주인공은 일본 유튜버 키류 코코다. 작년 한 해 동안만 생방송을 진행하며 슈퍼챗으로 17억 원을 번 키류 코코는 버추얼 유튜버다. 올해 5월에도 한 달 동안 5억 원이 넘는 후원금을 받아 월간 1위를 차지했다. 이런 일본 버추얼 유튜버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대단하다. 일본 버추얼 유튜버 그룹 및 프로젝트 총괄 기업인 애니컬러 주식회사가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에 이어 한국에서 만든 신유야의 경우 올해 5월 한국 시장에서 슈퍼챗으로 하루 동안 1600만여 원을 모아 일일 최다 수입을 기록했다.
이런 세계관은 단순히 자사 홍보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온라인 쇼핑몰 ‘생활지음’의 온라인 모델이 된 가상 인간 루이는 한국새생명복지재단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300만 명이 넘는 SNS 구독자를 보유한 릴 미켈라(Lil Miquela)는 모델 겸 가수로 활동하며 흑인 인권 운동에도 앞장선 결과, 미국 시사주간 '타임'이 선정한 ‘2018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MZ세대를 이해하라
기성세대가 봤을 때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사실상 캐릭터)과 소통하고, 그를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은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AI 모델을 만드는 업체들도 이런 생각을 가진 기성세대를 설득시키거나 시장으로 끌어들일 생각이 없다. 그들의 타깃은 1980∼2000년 초반에 태어난 MZ세대(밀레니얼+Z세대)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과거에도 있었다. 1998년 등장한 사이버 가수 아담이 시초라 할 만하다. 그의 노래 ‘세상엔 없는 사랑’과 그가 직접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는 적잖은 인기를 누렸다. 그 결과 지난 2018년 방송된 JTBC ‘슈가맨’을 통해 다시금 언급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각종 포털 사이트나 SNS에는 아바타나 미니미라는 개념이 있었다. 웹상에서 유저들의 정체성을 담은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런 콘텐츠가 등장하던 시기를 향유한 X세대나 Y세대들은 가상과 현실을 분명히 구분지었다.
MZ세대는 또 다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가상 인플루언서의 외모 자체가 달라졌다. 누가 봐도 컴퓨터그래픽 같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실물과 가상 모델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대중이 느끼는 이질감도 적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로 소통 역시 보다 원활해졌다.
이런 개념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가 새롭게 론칭한 4인조 걸그룹 에스파에게는 그들의 분신과 같은 가상 인간 멤버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 “우리는 8인조”라고 말하곤 한다.
MZ세대는 이런 세계관에 동참한다. 나고 자라며 스마트폰을 접하고, 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익숙한 그들에게 SNS에서 만나는 가상 인플루언서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존재다. 친구들과 대면 활동을 하지 않고 SNS로 관계를 맺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는 “MZ세대에게 가상 인플루언서와의 소통은 하나의 놀이다. 오히려 그들이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이라며 “가상과 현실을 접목시키는 메타버스 콘텐츠가 늘어가는 추세 속에서 가상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은 향후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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