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1992년 1월 발생, 전 국민을 경악케 했던 의붓아버지 살해 ‘김보은 양 사건’을 필두로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이 대한민국의 여름을 뜨겁게 달궜고, ‘쌀 시장 개방 절대불가’ 공약으로 농촌 표심을 공략한 김영삼 전 대통령 당선이 1992년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다. ‘대한민국 대표 주간지’ <일요신문>이 대판에서 타블로이드판으로 변신, 재창간한 해 역시 1992년이다. <일요신문>은 창간 19주년을 맞아 1992년 한 해를 풍미했던 스포츠 스타들 7인을 만나봤다. 19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모습을 전격 공개한다.
#‘해태왕조’의 안방마님, 장채근
1980~1990년대 프로야구를 평정한 ‘해태왕조’. 명장 김응용 감독을 중심으로 뭉친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 장채근 이종범 조계현 이강철 등 초호화 군단은 19년 동안 무려 9차례 우승을 일궈내며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특히, 해태 전성기를 이끈 ‘국보 투수’ 선동렬 전 감독-장채근 전 히어로즈 코치(49)의 ‘환상의 배터리’는 지금까지도 야구팬들의 맘속에 뭉클한 감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장 전 코치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마지막 공을 받아내면 곧장 마운드로 직행해서 (선)동열이 형을 번쩍 안아들었다. 우승을 독차지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둘이 정말 죽이 잘 맞았다. 둘 중 컨디션 좋은 쪽에게 그날 경기 볼 배합을 믿고 맡길 정도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 물론 술 궁합도 기가 막혔다(웃음).”
1995시즌을 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은퇴한 그는 해태-KIA-히어로즈 코치로 12년간 지도자 생활을 했다. 2008년을 끝으로 야구장에서 모습을 감춘 뒤 지금은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다. 광주 평동공단 내 위치한 철강회사 중원스틸(주)에서 만난 장 전 코치는 특유의 넉살로 1992년 당시 추억을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1988, 1991, 1992년 세 차례 골든 글러브를 받으면서 실력이 급성장하던 때였다. 반면, 결혼이 자꾸 늦춰져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하던 때이기도 했다. 당시 내 나이가 서른이었으니 말이다. 그 해 3할 타자가 된 뒤 신부를 맞이할 계획이었는데 둘 다 실패하고 골든 글러브만 건졌다(웃음).”
현역시절 두 차례 20홈런을 쳐내는 공격형 포수로 팬들의 사랑을 받은 그다. 프로야구 30년사에서 포수 출신으로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MVP(최우수선수)를 거머쥐기도 했다. 그러나 장 전 코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며 자세를 낮춘다. “당시 해태는 25% 연봉 상한제를 견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25% 인상이 고작이었다. 피드백이 없으니 선수들도 ‘열심히 해봐야 뭐하나’란 생각에 금방 지쳤다. 물론 막상 경기에 들어가선 승부욕에 불타 기어코 이기고야 말았지만(웃음). 그러나 자기 계발에 미흡했던 건 사실이다. 그때 좀 더 열심히 했다면 선수 생활도 더 길어졌을 텐데 아쉽다.”
중원스틸(주)은 광주 철강회사 중 2~3위에 드는 규모 있는 회사다. 장 전 코치는 영업관리이사직을 맡아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이재영 중원스틸(주) 사장과 함께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 잠시 야구계를 떠나있는 그지만 지도자로서의 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아마야구 지도자로서 볼 배합 기술과 타격을 겸비한 전문 포수를 양성하고 싶다고. 장 전 코치의 야구계 컴백이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1992년 축구계의 큰 별, 정재권
1992년 한국 프로축구의 시선이 ‘날쌘돌이’ 정재권(40)에게 집중됐다. 한국 축구의 큰 별로 떠오른 그의 진로가 제 7구단 완산푸마축구단의 출범과 더불어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 부산상고 3학년 때 청소년대표에 발탁돼 일찌감치 가능성을 보인 그는 1991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해 사상 첫 대회 우승을 이끌며 축구 관계자의 눈을 로잡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발군의 스피드로 모로코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으며 승승장구했다. 별 중의 별로 떠오른 그는 프로축구 스카우트 0순위로 꼽혔고, 일본에선 역대 최고 몸값 4억 8000만 원을 제시하며 영입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곳은 실업팀 중소기업은행. 국내외 러브콜을 마다하고 기업은행으로 향한 정 코치의 결정 속엔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 “올림픽 대표팀에서 훈련하고 있을 때, 은사님이던 한양대 감독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내 모든 것을 의지하던 분이 돌아가시자 너무 혼란스러웠다. 국내 프로구단도 일본도 갈 수가 없었다. 몸과 맘을 추스르고 싶었다. 1992년엔 약 7m에 불과한 골대가 20m로 보일 정도로 그야말로 ‘차면 들어가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론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정재권 한양대학교 코치(41)는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과정 중인 그는 오전 8시 15분부터 한양공고로 교생실습을 나간다. 실습이 끝나면 즉시 축구부 코치로 변신한다. 선수들과 한바탕 운동장을 뛰고 나면 숨 돌릴 틈 없이 책상 앞에 앉는다. 대학원 과제와 AFC P급 지도자 공부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 P급 지도자 수료 코스는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하는 1급 지도자 과정보다 한 단계 높은, 아시아권 축구 감독이 취득할 수 있는 최상위 지도자 라이선스다. 동시에 세 가지 일을 병행하는 정 코치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은퇴한 뒤 사실 일본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동의대학교 코치-동래중학교 감독직을 맡게 됐고, 자연스레 지도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됐다. 올해 안으로 석사, P급 지도자 과정을 모두 수료하게 된다. 선수들 하나하나와 소통하는 훌륭한 스승이 되고 싶다.” 친정팀 부산 아이파크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다는 정 코치. 그의 힘찬 날갯짓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 여자 역도의 간판, 최명식
159㎝의 작은 체구, 21세의 어린 소녀가 세상의 무게를 두 팔로 힘껏 들어올렸다. 한국 여자 역도의 전신, 최명식(40)을 기억하는가. 1987년 충남 아산 명인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바벨을 잡은 최명식은 한국 신기록을 끊임없이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3번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8개와 동1개를,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 여자역도의 대들보다.
최명식은 35세까지 육아와 선수생활을 병행하면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주부 역사’의 저력을 과시했다. 지금은 울산광역시청 소속 역도부 코치로서 선수 육성에 힘쓰고 있다. “사실 지금도 틈만 나면 감독님이 ‘선수로 좀 더 뛰어보라’며 협박(?)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 셋 낳은 주부로서 더 이상은 무리다(웃음). 지금은 선수들을 지도하는 게 너무 즐겁고 보람 있다. 될 수 있는 한 코치로서 오래도록 선수들과 함께하고 싶다.”
1992년은 최 코치에게 뜻 깊은 한 해였다. 90년 북경아시안게임을 불과 보름 앞둔 8월, 최 코치는 약물검사에서 모두 양성반응을 보여 2년간 출전금지 처분을 받았다. 2년간 남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이를 악물고 노력한 결과, 그는 1992년 4개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약물오명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결코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해였다. “그때 당시 감독님께서 비타민이라며 주시던 알약 10개 중 1개에 스테로이드 성분이 함유돼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눈치껏 약을 버리거나 했는데 난 순진하게 감독님이 주시는 대로 꾸준히 다 먹었다. 그래서 수치도 내가 제일 높게 나왔다(웃음). 마냥 순진하기만 했던 내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집과 체육관을 오가며 운동만 했기 때문일까. 역도를 하지 않았다면 여행작가가 됐을 것 같다고. “아직까지도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내 아이들은 운동을 안 시키려했는데 셋째가 운동신경이 탁월해 보이니 욕심이 생기더라. 하고 싶다고 하면 당장 시킬 생각이다(웃음).”
#‘김연아급’의 인기, 유도 김미정
1992년은 용인대 김미정 교수의 인생에 최고의 정점을 찍었던 한 해였다. 바르셀로나올림픽 72㎏급에 출전했던 그는 여자 유도 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세계 유도계에 파란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특히 선수 김미정은 92년 한 해 동안 47연승이란 대기록을 달성하며 국내외 유도계를 평정했다. 하지만 1994년 은퇴를 했고, 두 달 만에 같은 종목의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김병주(현, 공군사관학교 교수)와 결혼, 현재 세 아이를 두고 있다.
지난 13일, 기자와 만난 김미정 교수는 유도학과 학과장을 겸임하고 있다며 바쁜 일상을 그대로 내보였다. 자연스럽게 19년 전의 올림픽 메달 스토리를 꺼내 들자, 그는 “이젠 그 일이 나한테는 먼 옛날 일로 회상된다”면서 “올림픽 메달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 적도 있었는데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지금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라고 쿨한 면모를 보여줬다.
“유도는 항상 남자 선수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됐던 종목이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남자가 예상을 깨고 금메달을 따지 못했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이 나온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정말 난리가 난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도 해보고 택시를 타거나 음식점에 가면 돈을 받는 대신 대부분 사인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인기라는 단어를 실감했고, 너무 많은 관심을 보여주셔서 올림픽 이후 살짝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선수 생활 시작하면서 ‘은퇴는 최고였을 때 한다’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고 학교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던 게 전임교수까지 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은퇴 후 27세에 ‘엘리트 선수 출신 여성들의 삶’이란 주제로 박사 논문에 통과했고, 29세에 정식으로 교수에 임용됐다. 우리나라 여자 최초로 국제심판자격을 갖춰 심판으로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서는 짜릿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 올림픽위원회 포럼이 열렸는데 거기서 일본 다나베 선수를 만났다. 바르셀로나올림픽 결승 때 만난 이후 처음이었는데 은퇴 후 무도대학 코치로 있다고 하더라. 난 세 아이의 엄마인데 다나베는 아직 미혼이었다. 다나베가 올림픽에서 패한 후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19년 만의 만남이라 그런지, 서로 웃으며 해후할 수 있었다.”
#‘무게 씨름의 원조’ 김정필
1992년과 1993년 천하장사에 올랐던 김정필을 기억하는가. 고등학교 재학 당시 ‘천재 씨름 선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고등부 씨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는 1992년 프로에 전향하면서 계약금으로 1억 5000만 원을 받을 정도로 특급 신인으로 대우를 받았다. 데뷔 첫 해부터 백두장사, 천하장사 등 잇달아 정상 등극에 성공하며 무서운 신인으로 존재감을 드러냈었다. 김정필 씨의 전성기는 그 후로 3년여간 계속되다가 2003년 은퇴 후 잠시 식당업을 하다가 지금은 대구광역시 씨름협회 심판이사를 맡고 있다.
“내가 대학 대신 프로에 진출했던 이유 중 하나가 강호동 선배와 맞붙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호동 형은 나보다 세 살 위였는데, 이만기 선배를 물리치고 씨름계를 주름잡은 인기 스타라 내 눈에는 우상과도 다름없었고, 반드시 호동 형과 대결해서 진정한 승부를 가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프로 데뷔 후 4월에 울산에서 백두장사 대회가 열렸다. 호동 형이 8강에 가 있었기 때문에 나만 좋은 성적을 내면 절호의 기회가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호동 형이 대회 직전에 은퇴 선언을 해버리는 게 아닌가. 정말 황당했고 당황스러웠다. 그 대회에서 1등을 먹긴 했지만 우승보다 호동 형과 대결을 못했던 부분이 두고두고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씨름 선수들의 은퇴 후 삶이 궁금했다. 김정필 씨는 “천하장사를 했다고 해서 연금이 나오진 않더라”며 속내를 털어놨다.
“당시 씨름이 인기 종목이라 연봉도 높았고 무엇보다 상금이 엄청났다. 아버지가 은행에 근무하고 계셔서 재테크를 잘 해주신 덕분에 생활고를 겪진 않았다. 그러나 은퇴 후 어렵게 살아가는 선수들을 볼 땐 마음이 편치 않다. 사회 경험이 없다보니 사기를 당하거나 사람한테 배신당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그래도 모두 힘들게 살지는 않는다. ‘람바다 춤’으로 유명했던 박광덕은 인천에서 족발집을 운영 중인데, 요즘 장사 잘된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김정필 씨는 대구시씨름연합회가 씨름의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실시한 무료 씨름 교실에서 직접 강사로 참가해 남녀노소 일반인들을 상대로 씨름 강습을 하기도 한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