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이로써 백제 역사는 한반도를 넘어 인류의 문화 자산이 되었다. 백제 문화의 가치와 동아시아 교류사 속의 위상을 짚어본다.
475년 개로왕 때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백제. 급하게 피난처로 삼은 곳은 차령 너머 웅진(공주)이었다. 백제는 웅진을 도읍으로 삼고 공산성을 쌓았다. 북쪽과 동서쪽은 금강을 자연방어선으로 삼고 산 능선을 따라 견고하게 성벽을 쌓아 천혜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한성기 몽촌토성과 사비기 부소산성과 동일한 입지 2.4km의 동일한 규모를 보이고 있는 공산성. 한성 도읍 시기 백제의 문화적 기반은 위급한 정세 속에서도 그대로 웅진으로 옮겨졌다. 위기 속에서 새롭게 국가의 터전을 닦고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주려했던 당시의 상황이 공산성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백제 문화의 핵심을 알려주는 옛 기록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에 걸맞은 아담한 규모의 공산성 내 왕궁 추정지. 이곳에선 여전히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공산성 내에서 발견된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장식 기와들은 궁이나 사찰, 종묘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이 역시 이곳을 왕궁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일본 나라현 아스카 마을에서 발견된 기와는 백제의 연화문 기와와 흡사한 디자인과 입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첫 번째 불교 사찰인 아스카데라를 설립할 때 백제에서 와박사 (기와 전문가)가 4명이 파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의 아스카 시대의 문화는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여 화려하게 꽃피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성왕 대에 이르러 또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바로 사비(부여)로 천도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아무런 기반 시설이 없던 이곳에 성왕이 천도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비는 웅진에 비해 넓은 들판을 가지고 있었고 백마강이 있어 해외 진출과 교류에 유리했으며 가야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북방의 영토를 상실한 백제는 사비 천도를 통해 백제를 부흥시킬 원대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부여의 관북리 유적은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동서 35m, 남북 18.5m의 대형 건물터. 정연한 직선 도로의 흔적과 수로, 나무와 돌로 된 대형 저장고 등도 발견되었다. 또한 저장고 안에서는 복숭아, 참외, 살구, 다래, 오이 등의 씨앗이 다량 출토되었다. 고구려 침입으로 급하게 천도했던 웅진과는 달리 사비도성은 철저한 계획도시로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체계적으로 건설되었다.
계획도시 사비의 방어시설도 완벽에 가까웠다. 왕궁 바로 뒤에 부소산성을 쌓아 방어 기능을 하게 함과 동시에 유사시 대피장소로 삼았다. 사비도성의 방어 체계를 보여주는 특별한 유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성이다. 도시에 외곽에 또 하나의 성을 쌓아 2중의 방어선을 구축했던 것인데 이는 한반도 역사에서 주민이 사는 전체 도시를 성벽으로 두른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성을 쌓는 백제인들의 기술 또한 뛰어났다. 백제인들은 부엽 공법과 판축 기법을 사용했다. 부엽 공법은 나뭇잎이나 가지 등을 점질토와 함께 바닥에 깐 다음 성을 쌓는 기법, 판축 공법은 나무판자와 기둥을 이용해서 틀을 짠 다음 흙을 다져 쌓아올리는 기법으로 백제의 토목건축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이러한 백제인의 건축 기술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후쿠오카 외곽의 다자이후. 664년 설치된 지방 행정부였던 다자이후의 도시 구조는 사비와 유사하다. 다자이후 관청의 배후에는 산성인 오오노조와 키이조가 있으며 외곽에는 토성인 미즈키가 있다. 이는 왕궁 뒤에 배후산성인 부소산성을 배치하고 외곽에 나성을 쌓았던 사비성과 동일한 구조이다.
또한 미즈키에서 사용된 축조법 역시 백제의 판축 공법과 부엽 공법이 동일하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우리가 왜 금동대향로를 백제 문화의 아이콘이라고 말하느냐. 거기에는 백제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있어요. 도교적인 것, 불교적인 것, 음양오행과 같은 사상이 녹아 있는데 그 사상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 금동대향로는 당시 백제의 금속 공예 기술과 백제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상이 어우러진 백제 시대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연꽃봉오리 형태로 위에는 봉황이 올라앉아 있고 아래는 용이 받치고 있는 형태. 뚜껑에는 산봉우리가 층층이 겹쳐진 사이로 36마리의 상상의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 17명의 신선,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백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조명하며 1400년 전,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국가로 활발히 활동했던 백제의 위상을 짚어본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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