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7일 서울 민주당 당사에서 재·보선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박지원 원내대표가 TV출구조사 결과 분당을 손학규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발표되자 환호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민주당 내에선 박 원내대표가 평의원으로 돌아오자마자 차기 당 대표를 노릴 것이라는 관측에 이견을 다는 사람이 없다. 그럴 정도로 지난해 5월 원내대표 등극 이후 여권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민주당의 존재감을 심어준 주역이 바로 그였다.
그는 차기 대권주자의 덕목으로 거론되는 시대적 리더십, 대중적 인기, 미래비전을 온전히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천부적인 정치적 직관, 타협과 비타협을 오가는 정치력, 여론 흐름을 바꾸는 언론감각에선 현역 정치인 가운데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국의 흐름을 꿰뚫고 정치세력을 확장해 치러야 하는 차기 총선의 사령탑은 물론, 야권으로의 정권교체를 위한 대권주자를 만들어낼 ‘킹메이커’로 그만큼 능력을 갖춘 대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주변에서 거론하는 박 원내대표의 최대 장점은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사람’만이 습득할 수 있는 권력의 생리를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한 측근은 “박 원내대표의 정치경력은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 문화체육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사실만으론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김정일에게 현금을 전달했을 만큼 DJ의 ‘통치자금’ 관리까지 관여했다. 그 돈에는 인간관계가 따라붙게 마련이다. 여기에 기업들의 대정부 민원, 정부 내 인사 청탁이 그의 입과 손에서 벌어졌고, 그런 권력 거래에서 그는 타고난 친화력으로 네트워크를 쌓았다. 지난 2009년 7월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를 낙마시킨 ‘면세점 고가 쇼핑’의 근거자료를 박 원내대표의 현 보좌관이 청와대 행정관 시절 함께 근무했던 관세청 전 직원에게서 입수한 것으로 드러난 것만 봐도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올해 1월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가 낙마했을 때에도, 김태호 총리 후보자와 장관 후보자들이 줄줄이 중도하차한 지난해 8월에도, 민주당 안팎에서 “역시 박지원”이라는 찬사가 나온 것은 ‘박지원 네트워크’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그가 지닌 인맥과 정보력 네트워크의 기반은 그가 호남의 ‘대표주자’는 아닐지언정 ‘대표권력’이라는 위상이다. 이는 박 원대대표가 지닌 최대 자산일 뿐만 아니라, 킹메이커로서 그의 정치행보를 추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평의원 박지원’이 견지하게 될 손학규 대표와의 관계설정은 현재로선 ‘가근불가원’(可近不可遠)일 가능성이 높다. 가까울 수는 있으나, 분명히 ‘멀지 않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박 원내대표는 지난해 10월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조직담당이나 마찬가지였던 인물을 ‘빌려주었을’ 정도로 손 대표의 당권 장악을 막후에서 지원했다. 이번 손 대표의 분당 을 출마에도 겉으론 선거총책이라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피력했지만 이면에선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통해 결단을 압박했을 만큼 손 대표가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평소 “누구라도 박근혜의 치맛자락을 잡을 수 있다면 띄워봐야지”라고 되뇌던 대로 막후에서 추진한 야권 ‘대항마 키우기’의 1호가 손 대표였다.
박 원내대표는 그런 의도를 선거가 진행 중인 와중에 손 대표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며 ‘공개화’했다. “손 대표가 분당 을에 출마한 것은 당을 구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에 나가고, 노 전 대통령이 부산에 나간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손 대표의 ‘희생’을 강조했던 것인데, 결국 손 대표는 ‘사지(死地)에서 살아온 승부사’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자신의 한나라당 경력을 상당부분 불식시키게 됐다.
그러나 박 원내대표가 보내는 막후지원은 손 대표가 당 안팎에서 대권주자 위상이 유지되고, 자신에 대한 호남 지분을 온전히 인정할 때에만 유효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손 대표가 박 원내대표와의 함축적인 협력관계에서 벗어나려는 기미만 있어도 박 원내대표로선 ‘민주당의 정통성’이라는 칼을 내밀 수 있다. 이는 그가 늘 “킹보다 킹메이커가 더 냉혹한 결단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 원내대표의 위상은 야권통합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는 4·27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야권이 연합연대를 하면 이긴다는 것을 지난 6·2지방선거, 이번 4·27 재보선을 통해서 확인했다”며 “승리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왜 국민이 우리 야권 단일후보를 선택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해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패배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를 향해 “(민주당과 참여당은) 뿌리가 같기 때문에 통합에 대해서도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는 참여당이 주도적으로, 특히 유 대표가 통 큰 결단을 하면 더욱 국민들로부터 더 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압박을 가했다. 한마디로 ‘작은 집’ 생활을 청산하고 ‘큰 집’으로 돌아오라는 얘기다.
하지만 ‘평의원 박지원’으로의 귀환 길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박 원내대표에게 겨눠질 수 있는 견제의 함정도 만만치 않다. 원내대표 시절 그가 실질적인 민주당의 조타수를 자임하며 ‘1인 독무대’라는 인식을 심게 한 데 대한 당내 반감이 적지 않다. 당 수도권 의원들은 물론, ‘486그룹’과의 관계 설정도 변수다. 그가 지닌 호남의 ‘대표권력’이라는 위상이 한순간에 ‘구정치의 표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