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맘때의 정선은 봄과 겨울이 공존한다. 아침에 구절리역에서 멀리 가리왕산을 올려다보면 이런 풍경이 보인다. |
그러나 아직까지도 겨울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동쪽을 바라보는 산정에는 아침마다 상고대가 활짝 피었다. 계절에 둔감한 자작나무도 은빛 나신 그대로다. 정선 일대는 자작나무숲이 많다. 소나무숲 사이사이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푸른 산속 호수 같다.
화암약수터 앞에도 자작나무군락이 있다. 화암약수는 피부병, 위장병, 빈혈 등에 특효로 알려진 약수다. 칼슘, 불소 외에 몸에 꼭 필요한 9가지의 원소가 들어 있다. 톡 쏘는 맛이 난다. 이 물로 밥을 지으면 푸른색을 띤다.
화암약수 관광지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약수터 2개를 만난다. 초입에 있는 것이 쌍약수, 끝에 있는 것이 본약수다. 자작나무군락은 쌍약수 오른쪽 뒤편에 있다. 100여 종의 수종이 조림된 수목원 안이다.
자작나무는 본래 우리나라 자생수종이 아니다. 정선과 횡성, 태백 등지에서 많이 보이는 이 숲들은 모두 인공적으로 조림한 것이다. 자작나무는 껍질에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편지를 쓰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로도 널리 알려진 나무다. 숲속 자작나무는 아직 봄 속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주변의 다른 나무들은 어서 겨울의 옷을 벗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연하디 연한 잎을 밀어 올리며 그래도 한결 부드러워진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보다 인상적인 숲의 하모니를 보기 위해서 광대곡 쪽으로 길을 잡는다. 화암관광지로 묶여 있는 이 권역에는 화암약수를 비롯해 화암동굴, 용마소, 소금강, 몰운대, 광대곡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정선에서도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지역이다.
천포금광촌 뒤편에 자리한 화암동굴에는 모노레일을 타고 이동한다. ‘금과 대자연의 만남’을 주제로 꾸민 국내 유일의 테마형 동굴이다. 동양 최대의 석회석 광장과 역시 동양 최대 규모의 황종유벽, 부처상, 장군석 등 멋진 종유석이 많다.
소금강은 화암동굴에서 몰운대 가는 도중에 있다. 화암1리에서 몰운1리까지 4㎞ 구간에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작은 금강산 같다고 해서 소금강이다. 몰운대와 광대곡은 지척이다. 몰운대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광대곡 길이 나 있다. 광대곡은 하늘과 땅이 맞붙은 신비의 계곡으로 불린다. 이 계곡은 한낮에도 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깊고 험하다. 몰운대는 여름철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넓은 반석과 층층절벽이 인상적이다. 몰운대 근처의 강마을 풍경이 평화롭다.
화암약수터에서 광대곡 쪽으로 가는 길에는 총천연색 물결이 넘실댄다. 소나무, 이깔나무, 자작나무 따위가 때론 사선으로, 때론 수평으로, 때론 수직으로 정확히 조림돼 있는 산들을 만난다. 헐벗은 자작나무는 투명하게, 붉은 잎이 그대로 매달린 이깔나무는 홍조 띤 얼굴처럼 수줍게, 한 뼘씩 더 자라는 머리마다 연초록을 보탠 소나무는 싱그럽게 서로의 영역을 지킨다. 이 계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겨울이 닫혀가고 아직 봄이 완연히 열리긴 전인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정선의 숲 풍경이다.
싱그러운 숲의 기운을 즐기러 가리왕산자연휴양림으로 길머리를 잡는다. 가리왕산은 강원도 평창과 진부 사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오대천과 조양강의 발원지다. 본 이름은 갈왕산이다. 고대 맥국의 갈왕이 예국의 공격을 피해 숨어들었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산의 키는 1561m로 꽤 높고 골이 매우 깊다.
가리왕산은 아직까지도 아침이면 정상 부근에 하얗게 바람서리꽃이 핀다. 산 아래는 훈풍이 불지만 산 위에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무척 차기 때문이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 가는 길에 어느 작은 마을 어귀에서 특별한 나무를 한 그루 만나게 된다. 흰 수염 같은 잔가지들을 늘어뜨린 나무다. 햇살이 비치자 이 나무의 그 가지들이 눈부시게 빛난다. 나무는 빛에 굶주린 생물처럼 수만 개의 촉수로 날름거린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주목, 마가목, 자작나무, 구상나무를 비롯해 참나무류의 활엽수도 많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이곳에는 산나물이 지천으로 올라온다. 부푼 흙을 뚫고 나오는 곰취, 더덕, 산마늘 등을 캐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모여든다.
휴양림 계곡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는 제대로 봄이 내려앉았다. 계곡의 물을 좋아하는 버들강아지가 봄마중을 나온 것이다. 새양버들, 눈갯버들의 암수가 뒤섞여 햇살에 부서진다. 새양버들은 좀 더 녹색을 띠고, 눈갯버들은 하얀색에 가깝다. 특히 눈갯버들의 수꽃은 노란꽃가루를 날리며 화려하게 피었다.
레일바이크를 타며 봄을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제는 폐선이 된 정선선(線) 기차의 종착지인 구절리역으로 가면 레일바이크를 탈 수 있다. 2004년 9월, 마지막 기차가 떠나자 한동안 이곳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기차가 설 때도 타고 내리는 사람이야 극히 드물었다지만, 폐선이 된 후 마을은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다. 아니 기차가 떠난 자리를 철로자전거가 오가기 시작하면서 계절에 상관없이 봄은 시작됐다.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의 소리에 마을은 동면에서 깨어났다.
시속 30㎞. 네 바퀴 철로자전거의 최대 속도는 바람마저 어깨 위에 앉아 쉬어갈 정도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다. 길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더 느려 터져도 좋다. 이 싱그러운 계절을 피부로 느끼고 싶다면 천천히 앞으로 저어가야 한다. 빠르다는 것은 이 계절, 이 철로 위에서 결코 미덕이 아니다.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철로자전거 구간은 총 7.2㎞. 구절리역을 벗어나면서부터 눈에 다 담아두기 벅찬 정선의 봄 풍경이 쏟아져 들어온다. 기암절벽이 오른쪽으로 늘어서 있고, 아래로는 짙은 녹색강물이 흐르고 있다. 절벽 위에는 이리저리 뒤틀린 소나무들이 내려다본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길잡이: 영동고속국도 만종분기점→중앙고속국도 제천IC→38번 국도→정선 또는 영동고속국도 진부IC→59번 국도→정선
▲먹거리: 정선읍에 곤드레나물밥을 잘하는 싸리골식당(033-562-2358)이 있다. 고려엉겅퀴를 곤드레나물이라 부른다. 이 나물을 넣어 지은 밥은 쌉싸래하면서도 달다. 간장이나 막장을 넣어 입맛에 맞게 비벼먹으면 된다. 함께 나오는 꼴뚜기젓갈을 얹어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다.
▲먹거리: 가리왕산 쪽에서 묵을 생각이라면 가리왕산자연휴양림(033-563-1544)과 가리왕산민박(033-562-0035)이 괜찮을 듯하다. 화암동굴과 몰운대 쪽에는 몽촌빌(033-563-1182)과 별사랑펜션(033-562-0590), 구절리역에 가깝게는 강풍경펜션(033-562-2077)과 레일바이크펜션(033-562-9889)이 있다.
▲문의: 정선군 관광문화과 033-560-2363, 철로자전거 033-563-8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