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17일 축구회관에서 열린 프로축구연맹 상벌위원회에서 곽영철 상벌위원장(가운데)과 상벌위원들이 승부조작 혐의로 기소된 선수들의 징계 수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뉴시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계가 공표했던 ‘발본색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잎사귀는 잘랐지만 뿌리는 그대로 남아있기에 또 다시 비슷한 사태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승부조작 그 후…. 한국 축구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 재수없게 걸렸을 뿐?
연맹의 징계를 놓고 여러 가지 말들이 끊이질 않는다. 상벌위는 김동현(상무)에게는 금품수수, 승부조작 공모 및 선수 포섭을 들었고 박상욱 김바우 신준배(이상 대전), 성경모(광주) 등 8명의 선수들에 대해 금품수수와 승부조작을 직접 실행했다는 이유를 들어 K리그 선수 자격 영구 박탈의 징계를 내렸다. 또 승부조작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불법 베팅을 한 혐의가 밝혀진 김정겸(포항)에게는 K리그 선수 자격정지 5년을 부과했다. 징계를 받은 선수들은 향후 K리그와 관련한 어떠한 직무 자격도 상실하게 됐다. 새로이 체포된 전남과 상주 선수들에 대한 징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1차 징계와 크게 수위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물론 선수자격 박탈과 직무 정지 등은 연맹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처벌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연맹과 K리그 각 구단들은 최초 사태가 검찰 수사를 통해 불거져 나온 뒤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다짐했다. 과연 몇몇 선수들에게 징계를 내린다고 모든 의혹이 사라졌을까? 정말 대전, 광주, 포항 등 일부 선수들만이 불미스러운 승부조작에 가담했을까?
작년 여름부터 승부조작 얘기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전 구단들에 확산돼 있다는 얘기도 꾸준히 나왔다. 이러한 마당에 사실상 모든 게 종결된 듯한 느낌은 허탈감으로 다가온다. 모 구단 감독은 “‘재수 없게’ 걸린 선수들만 처벌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정작 필요한 부분은 아직 건들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승부조작을 직접 작업했던 브로커들은 잡히지도 않았다. 몇몇 제보자들은 “이번에 검찰에 붙잡힌 선수 중 일부가 직접 승부를 조작했다”는 설을 제기하지만 브로커들의 잠적으로 보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아예 거론되지도 못했다. 합법을 가장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던 스포츠토토 프로토 경로를 통한 결과에만 주목했을 뿐이었다.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 해외에 기반을 둔 사설 불법 베팅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못했다.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맹(더 나아가 축구계)이 이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설 불법 베팅이 스포츠토토 등 합법을 가장한 비리 행위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최근 열렸던 FA컵 16강전에서도 몇몇 중국 유학생이 경기 내용을 세세히 보고하는 장면을 적발해 놓고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FA컵을 주관한 대한축구협회도 “수사 권한이 없는지라 우리로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는 입장만을 표명했을 뿐이다. 협회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조기경보시스템 등을 도입해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떠들썩하게 발표한 바 있지만 한 순간의 ‘위기 넘기기식’ 조치였을 뿐이었다.
▲ 대전 시티즌 황진산 선수가 지난 5월 29일 현대 오일뱅크와의 경기에서 선취골을 넣은 후 팬들에게 사죄의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
승부조작이 연관된 구단들에게 내려진 징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대전은 올해 체육진흥투표권 수익금 30%(약 2억 7000만 원)를 감액한 금액만을 받게 되고, 광주와 상주도 수익금 10%(약 9000만 원)가 감액된 금액을 받는다. 좋게 봐서 여기까지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포항은 엄중 경고를 받는 데 그쳤다. 어쩌면 재주를 부린 곰보다 나쁜 게 재주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중국인 노릇을 한 이들일지 모른다는 부분에선 포항에도 큰 징계를 내렸어야 한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적어도 광주, 상주와 같은 처벌을 내렸어야 옳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엄중 경고 조치는 축구 경기로 치면 옐로카드보다 못한 처벌이다.
# K 리그 구단들의 쇼
일종의 코미디였다. 구단들은 사태를 방관했거나 대충 수습하고 덮어두는 데 급급했다. “우린 조사해봤지만 (승부조작) 가담자가 전혀 없었다. 괜히 억울한 선수가 나오지 않게 해 달라”며 오히려 의혹을 제기했던 언론들에 화살을 돌리는 모습도 자주 포착됐다. 사태 직후, “근본까지 찾아내겠다”고 공표했던 모습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러나 대전의 해당 선수들은 검찰 조사를 받기 직전까지도 코칭스태프와 동료들에게 “그런 적 없다. 모른다”고 발뺌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강하게 의혹을 부인하던 선수들은 검찰 조사가 시작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잘못을 시인했고, 결국 구속됐다. 제자들이 굴비 엮이듯 줄지어 철창으로 떠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던 대전 왕선재 감독이 가장 불쾌해하고, 또 배신감을 크게 느꼈던 대목이었다.
아울러 비리근절위원회를 구성한 대한축구협회와 상벌위를 연 연맹과는 별개로 각 구단들의 조치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일단 대전은 외견상으로는 가장 적극적이었지만 여전히 한 편의 쇼와 같다는 느낌은 지우기 어려웠다.
지역 인사들을 대거 끌어들여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사태 해결 방안 모색에 나섰으나 결국은 인적 쇄신 방안을 내놓는 데 그쳤다. 선거가 끝나면 금세 직원들이 물갈이되는 평소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도 평소 구단 고위층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인물들을 내보내 ‘코드에 맞는’ 새 판을 짜기 위함이었다는 부정적인 시선이 주를 이뤘다.
K리그 시민구단 원조격이었던 대전은 오래 전부터 프런트의 대거 물갈이로 명성(?)이 자자했다. 일찌감치 사퇴를 결심한 전임 김윤식 사장과 구단 이사진이야 그렇다 쳐도 팀장급 이상 직원 전원에게 억지로 받아낸 사표는 결국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를 내보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더욱이 대다수 팀장급 직원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인적 구성이 달라진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공채로 선발한 인물들이었다. 사표 제출 종용은 엄연히 법적으로도 인정받기 어렵다. 부당 인사라는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불거졌던 사령탑 교체설도 도마 위에 올랐다. 올 초 잠시 수그러들었던 왕선재 감독의 교체 루머는 계속 이어졌다. 프로 팀들 중 정치적인 인사가 가장 횡행했던 대전이다. 공무원이 생뚱맞은 보직을 부여받고 구단 책임 간부로 내려오는가 하면 선거 캠프의 입김을 통해 내려온 직원의 입사까지 있었던 곳이다.
현장을 누벼야 할 실무자들의 연이은 이탈로 아마추어적 행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왕 감독의 해임설은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진 선수단의 힘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도무지 의욕이 날 턱이 없었다. 처음에는 성적 부진을 탓하더니, 급기야는 승부조작 관리 감독 소홀로 주제가 바뀌었다.
대전의 한 고참 선수는 “감독님이 대체 뭘 잘못하셨는가. 여기는 군대도 아니고 관리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다. 선수단 사적인 부분까지 어떻게 관리 감독할 수 있겠나. 결국 양심의 문제다. 모든 게 우리들의 잘못이지, 감독님은 잘못한 게 없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호소했다.
여기에 신임 사령탑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인물들은 과거에 비리, 폭행 등으로 불명예 퇴진을 당했던 지도자들이었다. TF팀에서 활동했던 지역 축구인도 “명예 회복을 운운하면서 또 다시 불명예를 감수하려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정말 한심스럽기만 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이나마 ‘액션’으로 옮긴 대전은 나은 편이었다. 나머지 구단들은 “우리는 연루자가 없었기 때문에 조사할 필요도 없다”는 불안한 시선으로 조용히 파장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승부조작 사태에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던 팀들은 차치하고도 소속 선수가 구속 기소됐던 팀들조차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며 나선 인물들이 전혀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축구인은 “도무지 미래 계획이 없다. 상처에 직접 약물을 주입해 근본적인 치료를 하기보단 몇 바늘 꿰매는 봉합 정도에 그치고 있다. 연맹이 자진신고자에 최대 1억원 가량의 포상을 내린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잘못된 동료 의식이 존재하는 한, 선수들이 먼저 자진 신고를 할 턱이 없다. 알려졌다시피 간간히 들어왔다던 신고들도 이미 다 알려진 루머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꼬집었다.
더불어 선수 자격이 박탈된 선수들에게 어떻게 제2의 인생을 열어줄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병행돼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나온다. 한 에이전트는 “평생을 축구밖에 모르고 지낸 팔팔한 청춘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을 때, 남은 인생을 ‘나 몰라라’하며 외면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다. 축구계 전체가 여기에 대해서도 한번쯤 진지하게 논의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