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된 장종훈 한화 코치.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그럼요. 상상도 못할 그림이었어요.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선후배들도 아니었으니까.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얼굴에 분칠하고, 머리에 힘도 주고, 멋진 정장 입고 폼을 냈으니까요.
―각각의 레전드들과 야구로 얽힌 인연들이 다양한데, 짤막하게 소개 좀 해주세요.
▲김재박, 이만수 감독님은 제 우상이셨죠. 어렸을 때 그 분들을 보면서 야구를 했으니까요. 선동열 감독님은 워낙 공이 좋으셔서 제가 많이 당한 편이고요. 이겨보려고 나름 연구도 해봤지만, 공이 좋으니까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어쩌면 ‘선동열’이란 이름 때문에 타석에 섰을 때 먼저 기가 죽더라고요. 그럴수록 더 들이댔어야 하는데…. 한대화 감독님과는 해태 타이거즈와 빙그레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세 차례 만났을 때 번번이 우리 팀에 아픔을 주셨던 분이라 조금 미워했었어요(웃음). 한대화 감독님보다 더 미워했던 사람은 양준혁이에요. 제 기록을 다 갈아치웠으니까.
―양준혁 위원 이전에는 진정한 ‘기록의 사나이’였어요. 특히 1991년에는 도루를 제외한 전 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가 막판에 팀 동료인 이정훈이 0.348을 기록, 3리 차이로 타격 1위를 놓쳤었죠. 당시 출루율도 1위를 차지한 장효조에게 1리로 밀렸고요. 그것만 달성했더라면 이대호 선수보다 먼저 7관왕에 오를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제 불찰이었어요. 홈런에 집중하다보니까 타격에는 큰 욕심이 안 생기더라고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지금 아니어도 기회는 또 올 것이라고 믿었죠. 한창 잘나갔던 시절이라, 무서울 게 없었어요. 자신감도 충만했고.
(그랬던 선수도 내리막길을 타게 된다. 선수로 정점을 찍은 1992년이 지난 후로는 부상과 수술 등의 여파로 이전의 홈런왕 장종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장 코치는 은퇴 직전, 대주자로 내몰렸던 상황을 떠올리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주자는 장종훈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라고 곱씹는다)
―이 질문은 항상 빠트릴 수가 없네요. 어떤 투수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어요?
▲아까 선동열 감독님을 거론했지만, 그분보다 더 힘들었던 투수가 있었어요. 바로 강철이 형, 이강철 코치(KIA)예요. 그 형의 변화구는 마치 병뚜껑이 강한 회전으로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어요. 홈런은 쳤는데, 안타는 한 개도 못 친 걸로 기억해요. 정말 대단했어요. 공의 위력이.
―한창 잘나갔을 때 고 최진실 씨랑 스타데이트를 하기도 했었죠?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에요. 돌이켜보면 인기라는 게 부질없는, 뜬구름 같은 거더라고요. 최진실 씨는 나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 최고 배우 대접을 받았지만,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잖아요. 그분 소식 듣고 엄청 충격받았더랬어요. 아주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항상 관심이 있었거든요. 팬으로서요.
―선수 시절 장종훈 코치의 타구에 맞고 쓰러진 수비수들이 몇 명 있는 걸로 아는데요.
▲내가 그 부분에선 ‘전과’가 좀 많습니다. 1992년 LG랑 게임을 하는데 당시 1년간 재활하고 정말 힘겹게 복귀한 김건우 선배님이 계셨어요. 안타 치고 베이스러닝을 하다가 김건우 선배님이랑 부딪혔는데, 그만 팔이 부러지신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선배 입장에선 얼마나 화가 나고 황당하셨겠어요. SK 김원형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죠. 공을 던지고 끝까지 그 공을 봤어야 하는데,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제가 친 공이 투수의 얼굴을 향했던 거예요. 바로 그 자리에 쓰러졌죠. 오죽했으면 타격을 하고 1루로 뛰어가는 대신 쓰러진 투수를 향해 마운드로 달려갔을까요. 정말 끔찍했어요. 죄책감으로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머리를 싸맸습니다. 지금도 야구장에서 김원형을 만나면 제대로 눈도 못 마주쳐요. 미안해서요.
―반면에 사구도 많이 맞았다면서요?
▲내가 3년 연속 홈런왕할 때 3년 연속 몸에 맞는 공 1위였어요. 요즘 투수들은 얌전한 편이에요. 일부러 선수의 몸을 향해 투구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 때는 장난 아니었어요. 홈런 치고 나면 다음 타석에 나가는 게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십중팔구, 다 맞히려드니까요. 당시 어느 팀 감독님께선 제가 타석에 서면 더그아웃에서 이렇게 소리치셨어요. “장종훈 조심해! 하나, 날라간다~”하고요.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속으론 얼마나 쫄았는데요. 공에 맞을까봐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었죠.
(한 번은 투수 선동열한테 팔을 맞기도 했었단다. 순간 전기가 오면서 팔에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한다. 맞는 순간 부상을 떠올렸지만, 워낙 힘이 좋을 때라, 바로 다음날 시합에 나갔다고. 당시 김영덕 감독이 장종훈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너야말로 진정한 슈퍼맨이다!”라고)
―지도자로서의 삶도 만만치 않죠? 선수 때보다 챙겨야 할 것도 많고요.
▲그래서 요즘 선수들한테 이런 말 자주 해요. ‘가급적이면 오랫동안 선수 생활 유지하라’고요. 선수 때는 자기 성적만 좋으면 대우받으면서 운동하잖아요. 지금은 팀 성적에 따라 코칭스태프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터라 긴장을 늦출 수가 없어요. 2군에 내려와 보니 2군 선수들의 애로사항도 알게 됐고, 2군 선수들을 1군으로 올려 보낼 때의 뿌듯함, 보람도 생기고요, 1군에 올라간 선수가 다시 2군으로 내려올 때의 가슴 아픔도 느끼고 있습니다. 2군에서는 선수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해나가게끔 이끌어 가는 지도력이 필요해요. 1군에 있을 때는 매일매일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어요. 타격의 경우, 그때그때 결과가 나오니까요.
―시즌 중 1군에서 2군으로 내려갔을 때, 선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조금 충격이었죠. 내가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도 들고. 조금 억울한 면도 있었고요(웃음). 동계훈련, 스프링캠프를 거쳐 시즌에 돌입했고, 팀 성적이 바닥을 헤매다 막 치고 올라가는 중에 2군행을 통보받았기 때문에 아쉬움도 컸어요. 그러나 이 또한 경험이고, 배우는 과정이잖아요. 1군이든, 2군이든, 선수를 지도하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6년 전 인터뷰할 때, 잊지 못할 얘기가 기억나요. ‘연습생 신화’ ‘고졸 신화’로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정작 대학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는 내용이요.
▲맞아요. 은퇴 후를 생각해서 대학 진학을 고려했는데, 그렇게 될 경우 고졸 출신들한테 상처를 준다며, 오히려 주위에서 만류했었죠. 지금 우리 아이들이 물어봐요. ‘아빠는 왜 대학 안 나왔어요?’라고. ‘고졸 신화’로 포장된 제 인생이 너무 싫었어요. 벗어나고 싶었죠. 하지만 고졸 출신으로 연습생에서 홈런왕까지 오른 장종훈의 인생은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가식은 아니었으니까요.
장종훈 코치는 만약 자신이 지금 현역 선수로 뛰고 있다면, 꼭 상대하고 싶은 투수가 있다고 한다. 바로 류현진이다. 류현진 얘기를 꺼내면서 목소리 톤이 높아진 그는 나름 이런 공략법을 갖고 있었다.
“현진이의 서클체인지업은 치기 어려울 것 같고, 무조건 직구 하나만 보고 들어갈 겁니다. 설령 삼진을 먹는다 해도 실투가 들어올 경우 운 좋게 칠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 때 최창호 이상훈 등 왼손 투수들이 아주 좋았어요. 그 선수들이랑 현진이 스피드랑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직접 비교해보고 싶어요. 도대체 어떤 공을 던지기에 타자들이 못 치는지, 정말 궁금해요.”
대전=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