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이청용, 박지성, 박주영.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수많은 ‘설’이 난무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행선지 루머가 터져 나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지난 시즌까지 프랑스 르 샹피오나 AS모나코에서 활약해온 박주영이 그렇다.
모나코가 2부 리그로 강등되자 기다렸다는 듯 박주영의 선택에 시선이 집중됐다. 국내 언론들을 제외하더라도 벌써 각종 해외 매체들을 통해 거론된 클럽들만 무려 10여 개가 넘는다.
익숙한 프랑스에는 파리 생 제르맹, 릴OSC, 툴루즈, 스타드 렌 등 4개 팀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여기에 독일 분데스리가 샬케04, 이탈리아 세리에A AC밀란, 잉글랜드 리버풀FC, 볼턴 원더러스와 토트넘 홋스퍼 등이 행선지로 점쳐졌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세비야FC도 나왔다.
물론 이뿐만 아니다. 조금은 낯설었던 리그도 거론됐다. 대표적인 예가 우크라이나 전통의 명문 클럽 디나모 키예프와 터키 쉬페르리그의 트라브존스포르. 사실 트라브존스포르는 박주영과 함께 K리그 FC서울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세뇰 귀네슈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지만 키예프의 경우는 다소 의외였다.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보도도 터졌다.
그렇다면 박주영 측의 의견은 어떨까. 지난 3월 이후 박주영은 “꼭 빅 리그가 아니더라도 여러 곳의 리그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7월 중순까지 3군데로 압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주영의 국내 에이전트는 “박주영은 어느 한 곳을 정해놓지 않았다. 다양한 지역을 총망라해 가장 적합한 팀을 물색해왔다. 유럽의 대리인을 구해 접촉을 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단, 선택의 기준은 유럽 클럽 대항전 출전이었다. 금전적인 조건은 두 번째 기준이었다. 리버풀, 밀란, 키예프와 가장 적극적으로 협상을 진행했다”고 귀띔했다.
키예프는 2011~2012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예선 라운드부터 출전하기 때문에 유력한 후보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꿈의 무대’로 불리는 챔피언스리그와 명성에서는 한 단계 낮지만 만만치 않은 영예를 부여하는 유로파리그(전 UEFA컵)는 유럽 진출을 희망한 선수들에게 뚜렷한 기준이 되어 왔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캡틴’ 박주영한테도 챔스리그 출전은 오랜 꿈이었다.
모나코는 800만 유로(약 124억 원)를 2013년 6월까지 계약 기간이 남아있는 박주영의 이적료로 제시해왔다. 당초 600만 유로(약 97억 원)가 적정선으로 비쳐졌으나 영입을 희망하는 클럽들이 우후죽순 나타나면서 200만 유로 가량이 껑충 뛰었다. 희망 연봉 150만 유로는 또 다른 기준일 뿐이었다.
그래도 뚜렷하지 못했던 협상 루트는 아쉬웠다. 결국 협상은 유럽 현지에서 이뤄지기 마련. 박주영도 유럽에서 업무를 담당할 이탈리아 출신의 에이전트를 따로 구해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부정적인 면도 함께 있었다. 워낙 많은 클럽들과 접촉을 하다 보니 뚜렷한 근거가 없는 이적설이 난무했다. 항간에서는 “한국판 혼다 게이스케가 탄생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 최고의 축구 스타로 군림하는 혼다는 CSKA 모스크바(러시아)에서 뛰고 있지만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온갖 이적설의 중심에 섰다. 혼다에게도 직간접적인 접촉을 했던 팀들만 해도 현재까지 외부에 드러난 것만 무려 15개 팀 이상이었다.
모나코에서 선수 이적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관계자도 “도대체 어디가 (박주영의) 진짜 접촉 루트인지 모르겠다”고 고충을 털어놓았을 정도라고 한다. 구단도 제대로 확인 못하는 출처가 불투명한 이적설이 난무하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 다양해진 포지션·연령
유럽 이적을 노리는 건 박주영만이 아니다. 아직 수면 위에만 떠오르지 않았을 뿐, 여러 선수들이 유럽행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3~4명의 현직 K리거들이 2011시즌이 끝나는 올 연말 유럽 입성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문호가 넓어졌다는 게 흥미롭다. 특히 연령대가 다양해졌다. 올드보이부터 영건들까지 확실히 폭이 커졌다.
어디서나 그러하듯이 20대 초반의 선수들이 각광받는 건 틀림없지만 군 입대 이전에 한번쯤 유럽행을 노리는 선수들도 여럿 거론되고 있다. 지방 유력 구단에서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유럽 진출을 노리는 미드필더 A도 군 입대를 해결하지 않은 20대 중반이다. A의 구단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포지션의 다양화도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다. 성공적으로 팀에 정착한 한국 선수들의 전례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지동원, 박주영과 같은 최전방 스트라이커나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청용(볼턴) 등 측면 날개 외에도 기성용처럼 중앙 미드필더, 차두리(이상 셀틱) 등의 측면 풀백까지 전 포지션에 걸쳐 있다.
더불어 이적 타진의 출발점도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먼저 선수 측에서 접촉을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국 축구위상이 높아지면서 해당 클럽에서 오히려 선수 측이나 현재 소속 구단에 문의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흘러간 인연이 도움을 주는 일도 꽤 있다. 한때 K리그에 몸 담았던 용병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현역 은퇴 이후 구단 스카우트, 에이전트 등 축구 관련 임무들을 수행하면서 시작된 현상이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었던 라데(세르비아) 등 동유럽 출신 올드 스타들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는 어느 특정 클럽과 계약하지 않더라도 국내 선수들을 유럽 현지에 소개시키는 등의 업무를 하면서 선수-구단의 새로운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부와 명예를 쌓으며 맺은 기분 좋은 추억들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라데는 본국 세르비아에서 개인 사업을 하면서 한국 축구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물론 이는 한국, K리그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인접국인 일본에도 이러한 경우가 종종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사령탑 아르센 웽거 감독이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를 이끌 때 매니저 겸 통역 역할을 했던 한 일본인도 지금은 에이전트 사업을 하면서 웽거 감독의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고 있고, 몇몇 J리그 감독 등 코칭스태프 출신 외국인들도 유소년 선수 육성 등의 업무를 하면서 아시아 선수 관련 정보들을 유럽 클럽들에 전달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젠 마케팅보다 실력
한국 선수들이 유럽 클럽에 입단할 때 흔히 들을 수 있던 얘기는 바로 ‘유니폼 판매용’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이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마케팅 수익을 위한 빅클럽들의 ‘뻔한 속내’라고 할지 몰라도 그들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유럽에서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 혹은 실력이 확실히 입증됐을 때가 아니라면 선뜻 아시아 선수를 데려오기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빅리그, 빅클럽으로의 진출이 대개 그렇다. 이청용에 이어 박주영을 노린 리버풀도 굳이 이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공식 스폰서 스탠다드 차타드가 한국과 중동 시장에 주력하면서 이와 연계된 선수 영입이 또 하나의 시장 개척 활동의 일환이 됐다.
하지만 단순한 마케팅 차원이라면 해외 진출이 꼭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그라운드 대신 벤치만 뜨겁게 달구다 쓸쓸히 귀국해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미 중국 축구의 뼈아픈 상황이 이를 입증했다.
중국 최고 유망주로 꼽혔던 동팡저우는 벨기에 주필러리그 명문 클럽 로얄 앤트워프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2007년 잠시 맨유에서 박지성과 함께 머물렀지만 그가 있었던 곳은 거의 2군 리그였다. 결국 맨유에서의 적응에 실패한 동팡저우는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폴란드, 포르투갈 등 변방 리그를 배회하면서 ‘그저 그런’ 선수들 중 한 명이 됐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할까. 일단 긍정적이다. 유럽 언론들은 한국 축구의 급성장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 독일 분데스리가 무대로 진입하는 일본 선수들과 비교해 한국 선수들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선호되고 있다는 기분 좋은 현상도 함께 보도했다.
물론 한국 선수들에 관심을 갖는 곳은 박주영의 케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잉글랜드만이 아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 한동안 뜸했었던 지역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박지성은 어디서나 군침을 흘리는 ‘가장 성공한’ 아시아 스타가 됐다. 맨유와 재계약 여부,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 레버쿠젠 등은 물론 이탈리아 유벤투스, 스페인 세비야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행선지가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실력이 없다면 통할 수 없는 무대가 바로 유럽이다. 과거 일련의 과정, 예전 선수들의 활약상을 통해 한국 선수가 주전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이청용이 입단했다고 해서 볼턴의 공식 상품 판매가 급증하는 것도, 지동원이 새로이 몸 담게 됐다고 해서 선덜랜드가 국내 축구 팬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것 역시 아니다.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해 프리시즌 연습 경기를 갖는다고 해서 항상 환영을 받는 것 역시 아니다.
‘지구방위대’ 레알 마드리드의 명성을 밀어내고 명실 상부 금세기 최고 클럽에 우뚝 선 FC바르셀로나(스페인)가 한국 투어 경기를 갖는다고 성공을 보장해주는 시대도 지났다. 이는 이미 작년 K리그 올스타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분명 클럽 명성만으로 열광하는 동남아 축구와 한국은 크게 다르다.
오히려 어느 정도 한국 선수들이 실력을 갖춘 만큼 현지에서 기량을 쌓게끔 해 추후 이적을 통해 수익을 올리려는 측면이 크다고 보는 편이 훨씬 낫다. 확실한 ‘주류’는 아니더라도 ‘비주류’ 신세는 면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