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5월 30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한·일·중 정상회의 후 근처 올레길을 산책하고 있다. 제주 올레길은 이 대통령이 국내에 가볼 만한 휴가지로 제시한 10곳 중 하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김황식 국무총리는 지난 7월 19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소속 직원들이 마음 놓고 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장·차관들이 먼저 솔선해서 휴가를 꼭 다녀오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대통령도 7월 25일 라디오 주례연설에서 공무원을 비롯한 국민들에게 여름휴가 사용을 권장하면서 “국내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은 지역 경제와 서민경제를 살리는 데 큰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국내 휴가 활성화를 위한 공동캠페인’이 벌어지는 등 내수활성화에 대한 절박함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 같다”면서 “저도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꼭 가지려고 계획을 세워놨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은 또 국내에 가볼 만한 휴가지로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함께 △강원 인제 냇강마을 △경북 망양해수욕장 △부산 자갈치시장 △경남 남해 해바리마을 △전남 여수 금오도 △전북 임실 치즈마을 △충남 태안 볏가리마을 △충북 보은 법주사 템플스테이 등 10곳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휴가를 권장하자 장관들도 휴가를 속속 다녀오거나 휴가 계획을 내놓고 있다. 경제부처 수장인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 대통령의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휴가를 다녀왔다. 얼마 전 직원들에게도 휴가를 꼭 다녀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박 장관은 22일부터 25일까지 재정부 장관들이 여름휴가지로 자주 찾는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냈다. 당초 21일 휴가를 떠날 계획이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여·야·정 협의체 회의에 참석하느라 휴가가 하루 미뤄졌다.
박 장관은 휴가기간 중 전국경제인연합회나 대한상공회의소 행사에서 강연하는 기존 재정부 장관의 관례에 따라 두 차례 강연을 했다. 23일에는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주 신라호텔에서 주최하는 포럼에서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주제로 강의를 했고, 24일에는 제주 롯데호텔에서 21세기 경영인클럽이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해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및 기업의 역할’에 대해 강연을 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도 7월 말부터 가족들과 함께 남해안 통영과 거제 등지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최 장관은 휴가 기간 중 주변 전통시장을 방문하는 등 물가와 민생 상황을 점검했다. 정병국 문화체육부 장관은 8월 초 가족과 함께 강원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계획이다. 정 장관의 딸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의 메인 시설인 알펜시아를 꼭 가보고 싶어 해서 휴가지를 강원도로 정했다는 후문이다.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속초로 조만간 휴가를 떠날 계획이다. 이 장관은 휴가 기간 중 조정래 작가의 <황토> <황홀한 글감옥>, 김초혜 시인의 <어머니> 등을 탐독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경기도 가평에서 가족들과 1박 2일간 휴가를 즐긴다는 계획이다. 최광식 문화재청장은 가족들과 대구와 경주 울산 등지를 돌며 문화재를 탐방할 예정이다. 국립대구박물관의 ‘고려 천년의 귀향 초조대장경’ 전시회, 국립경주박물관의 ‘우물에 빠진 통일신라 동물들’ 특별전을 관람하고, 울산에서는 국보 제285호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다시 찾아볼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장관들이 앞장서서 휴가 사용을 독려하고 있지만 공무원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공무원들의 경우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할 휴가 일수가 연간 16일이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등 실제 휴가 사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휴가를 독려하고 있는 이 대통령부터 취임이후 2008년에는 5일, 2009년 4일, 2010년 5일의 휴가만 사용했다. 윗사람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휴가 사용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현안이 잔뜩 쌓여 있는 부처들은 운신 자체가 어렵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의 경우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9월 말까지 옴짝달싹할 수 없다. 휴가는커녕 매일 매일 예산 심의를 받느라 전쟁 중이다. 그나마 김동연 예산실장의 지시로 예산 심의를 되도록 밤 11시가 넘지 않도록 하고 있는 데 위안을 삼아야 할 지경이다. 물가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들도 시간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물가에 대한 이 대통령의 질책이 높은 데다 29일부터는 물가 회의가 차관 주재에서 장관 주재로 바뀌면서 일이 더욱 많아졌다.
대학 등록금과 방만 경영 감사, 공직 기강 감찰에 나선 감사원도 휴가는 엄두도 못 낸다. 최근 장마와 폭우에 소방방재청 역시 비상상황이다.
휴가를 갈 수 있는 공무원들은 2~3일 정도 휴가를 내고 있다. 그러나 휴가를 독려하는 윗사람의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이틀 휴가를 내고 주말까지 끼어서 제주도에서 나흘 정도 쉬다 왔다”면서 “위에서 국내에서 휴가를 보내라고 말하지만 공무원들의 휴가 기간이나 월급 사정상 어차피 해외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 휴가를 보내라며 독려하는 것 자체가 늘어나는 여행수지 적자를 메우려는 것이어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다”고 보탰다.
실제로 이 대통령과 장·차관들이 공무원들에게 휴가를 다녀오라고 권장하는 것은 해외 여행객 급증으로 여행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내수가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우리 국민은 지난해에만 1200만 명이 넘게 해외여행을 다녀왔지만 우리나라에 온 관광객은 800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국내 관광 비중이 프랑스는 65%, 캐나다의 경우는 80%가 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50% 정도에 그치고 있다”면서 “외국관광객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이 국내 여행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09년에는 원·달러 환율이 1500원까지 치솟으면서 해외 여행객이 감소, 여행수지 적자가 줄었지만 최근 환율이 떨어지면서 여행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5월까지 여행수지 적자액은 36억 850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여행수지 적자액은 2009년 같은 기간에는 6억 850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2010년 29억 9900만 달러로 증가한 데 이어 올해 더욱 급증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