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들이 그라운드를 떠나 벤치를 호령하는 사령탑으로 속속 입성하고 있다. 축구계에 새 바람이 불고 있지만 너무 이른 세대교체를 우려하는 시선도 교차하고 있다. 사진은 최용수 FC서울 감독대행 |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축구계는 한층 젊어지고 있다. 그라운드 속 ‘영건’에 기대를 거는 시선들이 이젠 테크니컬 에어리어 안쪽까지 넘보고 있다. 최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FC가 재건과 팀 리빌딩을 목표로 데려온 포르투갈 출신 30대 지도자 비야스-보아스 감독처럼 K리그 벤치의 연령도 대폭 낮아졌다.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감독(42)이 2012 런던올림픽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는 것과 별개로 월드컵 스타들의 프로축구 지도자 변신이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
# 젊은 지도자를 보는 시선
9년 전, 폴란드와 월드컵 조별리그 첫 대결에서 짜릿한 선취골을 넣었던 포항 스틸러스 황선홍 감독(43)은 부산 아이파크에 이어 두 번째로 팀 지휘봉을 잡은 베테랑 중 한 명이 됐다. 이어 FC서울 최용수 감독대행(38)이 진정한 사령탑으로서 본격적인 첫 걸음을 내디뎠고, 아마추어 고교 팀 춘천기계공고 감독으로 활동해온 유상철 감독(40)이 대전 시티즌의 신임 사령탑에 올랐다.
일단 기류는 긍정적이다. 대개가 흐뭇한 눈길로 이들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경험 많은 백전노장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신선함을 줄 젊은 지도자의 필요도 있다. 대대적인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는 요즘, 젊은 피의 수혈은 경기장 외적으로도 꼭 필요한 요소다.
그래서일까. 호칭도 “선생님”보다는 “형님”으로 지칭되고 있는 분위기다. 권위와 위압감은 없어진 지 오래. ‘삼촌 리더십’이 각광받는다. 당연히 벤치와 선수들의 거리도 많이 좁혀졌다.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주입하는 지도법도 거의 사라졌다. 세대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막내 동생뻘 선수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고, 그들 또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인다.
새로운 부분에 대한 배움에도 별 거부감 없이 열린 자세로 임한다. 한 예로 최용수 감독대행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황보관 전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했을 때, 별다른 준비도 못한 채 ‘대행’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나름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다. ‘서울을 가장 서울답게’ 만들었다는 호평을 받았던 세뇰 귀네슈 전 감독이 한국에 머물던 시절 남긴 전술 프로그램과 훈련법을 부지런히 수집했다. 하다못해 인터뷰 어록까지 직접 서울 구단 프런트에 뽑아줄 것을 부탁해 제본 책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르고 닳도록 밤새 읽으며 자기 것으로 습득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코치 자격으로 선수였던 최 감독대행을 지도했던 전남 드래곤즈 정해성 감독은 “(최)용수는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항상 강인했고, 리더십이 있었다. 톡톡 튀는 언변에서도 느껴지듯 자신감이 늘 넘쳤다”고 회상했다.
이에 대해 최 감독대행도 “지도자를 하다 보면 뭔가 새로운 걸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하지만 젊기 때문에 두려움은 거의 없다. 이 나이 때가 아니면 언제 좋은 경험을 해보겠는가”라며 활짝 웃었다.
황선홍 감독도 부산 시절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 물론 약간의 어려움도 있었다. 팀 운영에서 부산 구단 사무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포항 지휘봉을 잡는 과정에서 ‘사전 접촉’이라는 오해도 샀다. 독특한 지도 철학으로 선수들이 힘겨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겪고 난 지금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선수들부터 구단까지 ‘레전드’로 모시는 친정팀 포항에 온 뒤 황 감독의 표정도 훨씬 밝아졌다. 여유가 생겼고 특유의 부드러움까지 추가 장착했다.
▲ 유상철 신임 대전시티즌 감독. |
그렇다고 해서 2002년 월드컵의 주역들만이 K리그를 이끄는 건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한국 축구의 젊은 영웅들도 있다. K리그 특급스타 출신 성남 일화 신태용 감독(41)이 대표적인 케이스.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형님 리더십’을 앞세운 신 감독은 이미 강력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데뷔 첫 해였던 2009년, 핵심 멤버들이 대거 빠진 상황에서 K리그와 FA컵 준우승을 차지하며 합격점을 받았다. 작년에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우뚝 선 뒤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 월드컵에서도 선전을 펼쳤다.
지도력만 놓고 봐도 대단한 실력파임이 확인됐으나 신 감독을 떠올리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인터뷰 실력이었다. 톡톡 튀는 발언에는 항상 뼈가 담겼고, 쉬워 보이는 듯하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로 주위를 끌어오는 묘한 능력이 있다. 변변한 코치 경험도 없이 단번에 감독직에 오른 그이지만 어지간한 노장들보다 낫다는 평가가 나온다.
더불어 황 감독의 후임으로 부산 지휘봉을 새롭게 잡고 있는 안익수 감독(46)도 당당한 젊은 지도자로 통하고 있다. ‘솔선수범’ 리더십은 단연 놀라웠다. 제자들이 오직 경기와 훈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직접 골대를 나르고 훈련용 조끼와 ‘콘’을 일일이 챙기는 장면은 이색적이다. 인터뷰 때마다 선수들에게 “우리 아이들”이라 지칭하며 친근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앙팡 테리블(작은 악동)’ 이미지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고종수가 수원 삼성 코치(33) 자격으로 지도자 경력을 쌓고 있고, 원조 테크니션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윤정환(38)이 국내 무대 복귀를 준비하는 한편, 일본 J리그에서 부지런히 현장을 누비고 있다.
물론 젊은 지도자들이 항상 갈채를 받는 건 아니다. 갑자기 연령대가 대폭 줄어들며 많은 인재들에게는 악재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위 ‘끼어있는’ 세대들의 아픔이다. 일단 자리부터 부족하다. 한번 밀려나는 순간, 끝이라는 위기감도 엄습해온다.
# 떠밀리는 ‘낀 세대’ 지도자
국제적인 흐름이라고 해도, 전체적인 축구계 세태라고 해도, 변변한 기회조차 잘 주어지지 않는 작금의 상황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음지로 흩어지는 일부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때 프로팀 감독직을 수행했던 50대 초반의 A 감독은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30대 후반 내지 40대 중반 이하로 나이가 낮아져 그 외 축구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됐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40~50대만 되면 정년이 돼 은퇴를 해야 한다는 의미의 ‘사오정’이 축구계에서도 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점차 젊어지는’ 추세는 일부 지도자들로 하여금 해외 무대로 눈길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성공 확률이 훨씬 낮은 낯선 무대에서 홀로 싸워야 할 판이다. 더불어 대개는 아픔만 겪고 쓸쓸히 되돌아오고 있다. 해외에서의 실패는 국내보다 파장이 더욱 크다.
하지만 경험과 관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와 철학이 꾸준히 세대 간 이동을 통해 전수돼야만 축구계 전반이 발전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위기 대처와 결정적인 순간을 극복하는 능력은 젊은 감독에 비해 노장들이 한 수 위다.
이와 함께 젊은 세대로의 지도자 계층의 이동은 ‘헐값 계약’이란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전 구단과 계약기간 1년 6개월에 연봉 1억 5000만 원가량의 조건으로 지휘봉을 잡은 유상철 감독의 상황은 동조받기 어려웠다(항간에서는 월봉 1000만 원 이하라고 얘기한다). 유 감독 본인은 “조건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는 장차 젊은 프로 지도자들에 대한 기본 잣대가 될 수 있음을 감안해야 했다.
복수의 현직 K리그 감독들은 “제 아무리 대전이 ‘제멋대로’ 행정의 선두주자라 하더라도 팀 내 수장에게 어지간한 베테랑 선수들보다 못한 대우를 해준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감독부터 대우를 받아야 선수들도 두루 인정받고,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일갈했다.
젊은 사령탑 등장의 안타까운 이면이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