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의식 더디게 해” 검찰 ‘50억 클럽’ 수사 비판론…녹취 파일은 ‘참고 자료’ 수준이라는 지적도
#“50억 원씩 300억 원”
한국일보가 입수한 김만배 씨와 정영학 회계사의 녹취는 2019년 12월에서 2020년 7월 사이 10여 차례 나눈 대화다. 당초 검찰에서 이를 확보해 수사의 핵심 증거로 활용해 왔지만 녹취록이 언론에 공개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검찰만 확보했던 녹취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다시 ‘50억 클럽’ 로비에 대한 수사 필요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녹취록 대화 속에서 김 씨는 50억 클럽으로 지목된 곽상도 전 국회의원, 박영수 전 특검, 최재경 전 민정수석, 김수남 전 검찰총장, 권순일 전 대법관, 홍성근 머니투데이 회장 등 6명을 언급하며 “50억 원씩 300억 원”이라고 발언한다. 대장동 A12 블록 분양 수익을 통해 이를 제공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기도 한다.
특히 김만배 씨는 곽 전 의원의 아들이 아버지한테 주기로 했던 돈을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고, 서너 차례 나눠 주겠다고 답했다고 정영학 회계사에게 말하기도 한다. 곽상도 전 의원이 구체적으로 돈을 요구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박영수 전 특검의 경우 대장동 사업 초기 5억 원을 김만배 씨에게 건넨 사실도 드러났다. 녹취록에서 김 씨는 정 회계사에게 박 전 특검과 인척 관계인 분양업체 대표 이 아무개 씨에게 지급하기로 한 돈 문제를 언급한다. 김 씨는 “우리 법인 만들 때 돈 들어온 것도, 박영수 고검장(전 특검) 통해서 들어온 돈”이라며 “(이 씨) 통장에 그것은 해줘야 해” 등의 이야기를 했다. 이때 건네진 돈은 5억 원인데, 화천대유의 초기 자금으로 활용됐고 박 전 특검은 투자에 대한 수익을 약속받았을 것이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각각의 의혹에 대해 곽 전 의원 측은 “수사를 통해 녹취록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해명되고 있다. 무고하다”고, 박 전 특검 측은 “(5억 원은) 김만배 씨가 초기 운영자금으로 차용한 돈이고 자금 거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이 씨 등을 거쳐서 공식적으로 이체된 것이라 문제가 없다”고 해명을 내놓았다. 김만배 씨 측도 “정 회계사와 정산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과장된 말을 한 것”이라며 녹취록 내용에 대해 해명했다.
#커지는 수사 필요성
하지만 검찰 수사가 더디다는 비판은 더 커지고 있다. 공무원에게 로비를 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김만배 씨가 성남시 공무원을 여러 차례 접대했다는 취지로 대화를 한 것.
경찰 수사 과정에서도 김만배 씨가 성남시에 로비를 한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다. 김만배 씨와 화천대유 측으로부터 금품을 받기로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최윤길 전 성남시의회 의장은 1월 18일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경찰은 최윤길 전 의장이 화천대유 측으로부터 대장동 사업 추진과정에서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성과급 40억 원을 받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 인멸의 염려가 인정된다”며 영장 발부를 결정했다.
특히 영장 등에 따르면 김 씨는 2012년 3월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이던 3선 시의원 최 씨가 성남시의회 의장 경선에서 탈락하자 “의장에 당선되도록 도울 테니 성남도개공 설립 조례안을 통과시켜달라”고 제안했다. 결국 최 씨는 같은 해 의장에 당선됐고, 성남도개공 설립 조례안은 이듬해 2월 통과됐다.
이처럼 검찰의 스모킹 건(핵심 증거를 지칭하는 수사 용어)이었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자연스레 검찰이 수사를 미진하게 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특수수사를 빠르게 하고 싶으면 관련 핵심 증거인 녹취록 내용을 언론에 노출시키면서라도 동력으로 삼던 게 과거 수사 스타일 중 하나”라며 “그게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거꾸로 이번 수사 팀은 대선을 의식해 수사를 더디게 하고 있지 않나. 수사 팀은 녹취록이 언론에 노출된 것이 수사 일정에 대한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어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발한 검찰, 법원 입장은?
실제 검찰은 정영학 회계사와 김만배 씨 간 대화가 담긴 녹취록이 연일 언론에 공개되자 법정에서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1월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양철한 부장판사)에서 열린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 남욱·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등의 세 번째 공판에서 검찰은 “최근 증거기록 등사가 이뤄진 뒤에 녹취록이 통째로 유출돼 연일 보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며 “재판부에서 등사 허용명령 결정을 했던 부분 외에 나머지 녹음 파일에 대한 재판부의 명시적 판단을 구한다”고 요청했다. 녹취록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 수사에 차질이 된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
하지만 재판부는 “녹취 파일이 제공돼서 (피고인 측이) 증거 의견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녹취 파일 등사를 거부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은 분명하다”고 선을 그었다. 또 “(검찰 측이) 신청 받아서 (등사)하는 것보다 공식적으로 (재판부가) 등사를 허용하라고 말씀드리겠다”며 검찰의 취지와 달리 녹취 파일의 등사를 허용했다.
녹취 파일 안에 담긴 내용들이 언론에 계속 보도가 되면, ‘사실상 멈췄던’ 검찰 수사가 다시 진행되지 않겠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앞선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핵심 증거를 검찰만 가지고 있을 때에는 모르지만, 언론을 통해 여론이 형성되면 아예 손을 놓고 있기는 힘들다”며 “녹취 파일 내용 중 수사가 가장 진척된 지점은 진행이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빠른 수사’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특히 녹취록에 담긴 내용 중 상당 부분이 김만배 씨가 정치·법조계 인사 등으로부터 들은 ‘전언’을 얘기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전언은 형사 사건에서 증거로 쓰일 수가 없다. 김 씨가 여러 인물들로부터 뇌물을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전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증거가 아니”라며 “검찰이 결국 실제로 핵심 인물들과의 만남 및 돈 거래를 입증해야 한다. 녹취 파일 속 상당 부분은 형사법정에서는 핵심 증거가 아닌 참고 자료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김 씨 등 사건 관계자들 모두 녹취 파일에 대해 “과장됐다. 무고다”라고 선을 긋는 것도 이를 고려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부장검사 출신의 변호사 역시 “녹취록이 공개됐다고 해도 검찰 수사가 이미 대선을 고려해 느리게 일정을 잡은 게 눈에 보이는데 갑자기 의지를 가지고 수사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보완 수사를 통해 이미 한 차례 영장이 기각됐던 곽상도 전 의원 등에 대해 영장 재청구 정도로 비판 여론을 무마하려고 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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