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오픈에서 우승한 유소연을 7월 28일 충북 진천 히든밸리 골프장에서 만났다.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비포 & 애프터
“그동안 TV로만 봤던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서 축하 인사를 하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얼떨떨하기도 하고. US오픈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에비앙마스터스대회에 출전하려고 비행기로 이동 중 런던에서 골프백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선수들의 축하 인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찾긴 했는데, 너무 놀라는 바람에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US오픈 우승 후 프랑스 에비앙으로 향한 유소연은 우승 전과 우승 후 외국 선수들의 태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우승 전까지만 해도 초청선수 신분이긴 하지만 LPGA 무대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한국 선수들 외에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선수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에비앙에서 다시 만난 선수들의 태도는 이전과 큰 차이점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제 그들 사이에서 유소연은 더 이상 무명의 한국 골퍼가 아니었던 것이다.
#라이벌 & 동반자
유소연의 US오픈 우승을 두고 ‘3홀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우승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희경과 연장전을 벌였고 16홀부터 18홀까지 벌어진 라운딩 중 행운의 여신은 유소연의 손을 들어줬다.
“큰 대회의 우승은 실력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실력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보태져야 우승까지 이어진다고 봐요. US오픈 우승도 전날 기상 악화로 대회가 연기됐고, 마지막 라운딩을, 전 경기를 계속한 시점에서, (서)희경 언니는 이미 시합을 마치고 하루 쉰 다음 연장전에 돌입했잖아요. 보는 관점에 따라 제가 유리할 수도, 희경 언니가 유리할 수도 있었는데, 결국 그 행운이 저한테로 오게 된 거죠. ‘만약’이라는 단어를 갖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는데, 우승을 한 건 제 운이었고, 우승을 못한 건 희경 언니한테 행운이 다하지 못했던 거지, 그게 실력이 없어서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브리티시오픈 & 상금왕
스코틀랜드 앵거스 커누스티링크스에서 치러진 브리티시여자오픈. 유소연도 초청선수로 출전 자격이 주어졌었다. 그러나 유소연은 ‘선약’ 때문에 메이저대회 출전을 포기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미 히든밸리 여자오픈에 출전하기로 약속했고, 내년에 LPGA 투어를 시작할 경우, 올 시즌 하반기에는 한국 무대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상금왕에 도전해서 2위를 차지한 적은 있지만, 랭킹 1위를 못해봤거든요. 하반기 마무리를 잘해서 상금왕 먹고 가뿐한 마음으로 미국에 가고 싶었어요.”
유소연은 2009시즌 서희경과 치열한 상금왕 타이틀 경쟁을 벌이다 결국 서희경이 5승, 유소연은 4승을 챙기며 서희경에게 대상과 상금왕을 모두 넘겨줘야 했던 아픔이 있다. 그 경험을 잊을 수 없는 유소연은 올 시즌 KLPGA 상금왕 타이틀 도전을 위해 LPGA 진출 시기를 늦춘 것이다.
#엄친딸 & 우승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배웠고 영어를 미8군에서 배웠으며, 대원외고, 연세대 체육학과 입학 등 유소연의 커리어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엄친딸’이라는 단어가 떠올려진다. US오픈을 제패할 정도의 골프 실력에다 수준급의 영어 말하기, 그리고 인성과 인격이 느껴지는 골프매너 등등을 보이는 유소연을 가리켜 ‘월드 스펙의 소유자’란 수식어도 뒤따른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LPGA 무대를 누볐던 박세리, 김미현 세대와는 색깔의 차이가 분명한 ‘뉴 박세리 키즈’인 셈이다.
“제가 그렇게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건 아니에요. 아버지가 사업하시다 실패하시는 바람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부모님께서 내색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신 덕분에 그 영향을 덜 받을 수 있었어요. 미8군에서 영어를 배우게 된 것은 이모 아는 분의 딸이 저랑 동갑내기라 같이 다니게 됐던 거예요. 거기서 영어를 배운 것보다는 볼링 탁구 포켓볼 등을 치며 미국 문화를 체험했고,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대원외고에 입학한 건 체육특기자 신분으로 좋은 학교에 들어갔던 거죠. 친구들 대부분이 영어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저도 그 도움을 받았어요.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모든 과정들이 다 연결돼 있는 것 같아요. US오픈 우승을 하기 위해 작은 과정 과정들이 모여 작품을 이룬 것처럼이요.”
#박세리 & 우상
1998년 박세리가 US오픈에서 맨발의 투혼을 발휘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 유소연은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기 시작했다. 골프를 시작한 배경이 박세리로 점철돼 있다 보니 유소연한테 박세리는 ‘대통령’ 이상의 의미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번에 US오픈에서 박세리와 함께 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세리 언니를 처음 본 것은 지난해 하이트컵 챔피언십 때였어요. 언니랑 같은 조가 돼 라운딩을 했는데, 대회 자체보다 제 우상이랑 같이 골프를 친다는 게 너무 떨리고 긴장돼서 제대로 인사조차 못했던 기억이 나요. 그랬던 분이 제가 US오픈에서 우승하니까 일부러 달려와서 샴페인을 뿌리며 축하해주시는 거예요. 절 포옹하신 뒤, 아주 잘 쳤다고 칭찬해주시는데, 순간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웃음). US오픈 우승도 기뻤지만, 제 우상과 함께 축하를 나눈 사실은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학업 & 꿈
연세대 체육학과 3학년인 유소연은 학점 짜기로 인색한 교수들 사이에서도 매우 성실한 학생으로 소문 나 있다. 대회가 없을 때는 항상 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고, 시험을 빼먹지 않으며 리포트 제출에도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교수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것. 골프대회가 있는 전날에도 학교 숙제하느라 새벽까지 밤을 지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일화는 유소연한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전 공부하는 게 좋아요. 물론 운동이랑 병행하느라 시간과 체력적인 부담이 많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스포츠심리학, 운동생리학, 운동 역학 등을 배우면서 골프를 더 잘할 수 있게 되니까 공부가 더 재미있어지더라고요. 골프를 잘 치기 위해서는 어떤 근육을 사용해야 하는지, 위기를 겪을 때 어떤 자세로 이겨내야 하는지 등등 이론을 배울수록 실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절감하게 돼요. 단순히 학점을 따고 졸업을 위해서 공부를 했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공부를 할수록 골프가 잘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3학년 과정까지 올라온 거예요.”
유소연은 내년이면 졸업반이라 LPGA 투어 진출을 졸업 이후로 미룰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오랜 고민 끝에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장보다 지금은 LPGA 투어 생활이 우선이라고 결론내린 것이다.
“골프를 처음 시작했을 때 큰 그림을 그려놨었어요. 국가대표는 몇 살 즈음에, 프로 데뷔는 언제부터, 그리고 LPGA 진출은 어느 시기에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획들이 신기하게도 잘 맞아 떨어졌어요. LPGA 진출을 결심한 만큼 이제 더 큰 꿈을 그려야겠죠? 그건 바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것입니다.”
야무진 외모만큼 인터뷰하는 솜씨가 보통 이상이었다. 골프 실력보다 인성을 더 중요시한 부모의 가르침 덕분인지 유소연의 속내는 친절함으로 넘실거렸다. 시차 적응도 안 되고 새벽부터 프로암대회를 치르느라 피곤할 텐데도 유소연이 전하는 해피바이러스는 아열대성 스콜보다 더 강한 파워를 내보였다.
진천=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