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트랙터를 몰며 드넓은 밭을 일구는 억척 농부 김순복 씨(65).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화가 김순복' 이다.
스케치북 위에 색연필로 정성껏 그려내는 그녀의 그림 속엔 자식을 위해 한평생 흙을 일구는 우리네 부모님의 모습이, 언제라도 찾아가고 싶은 '고향의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참기름처럼 고소한 향기가 풍겨나는 순복 씨의 그림들. 그녀의 그림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거창한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위로를 건넨다.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설날을 즈음하여 순복 씨의 향수 어린 그림들을 통해 우리 고향의 모습을 돌아보고 화폭 속의 다정한 이웃들과 더불어 새해 인사를 나눠 본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김순복 씨. 그는 넓은 밭을 일구며 단호박, 대파, 봄동 등 다양한 작물을 심고 길러낸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트랙터를 모는 여성 농부로 손 많이 가는 유기농 농사도 거침없이 척척 해내는 순복 씨.
그녀는 농사 잘 짓는 똑순이 농부로 소문이 자자하다. 겉으로 보기엔 타고난 농사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시집오기 전까지 농사라고는 전혀 모르던 도시 내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화가를 꿈꿨던 도시 아가씨가 26세에 아홉 살이나 많은 남편을 만나 해남까지 내려왔다.
처음 해보는 농사일에 매서운 시집살이까지 견디며 버틸 수 있었던 건 사랑하는 남편과 5남매 때문이었다. 하지만 17년 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순복 씨의 인생은 온통 무채색으로 변해버렸다. 남겨진 아이들을 키워야 했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는 순복 씨, 그녀를 지탱 시켜 온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식들 키워내느라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순복 씨, 57세 생일날 딸이 선물한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받아든 순간 그녀의 인생에 다시 고운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시작한 화가로서의 삶. 단 한 번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 본 적 없지만 순복 씨는 스케치북 위에 평생 가슴에만 담아두어야 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쏟아냈다.
그림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수십 년 세월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돌담부터,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는 옆집 노부부, 꽃무늬 바지를 입고 봄동을 캐는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그녀가 보고, 느끼고, 겪는 모든 일상이 그림이 되었다.
그렇게 지난 5년간 그린 그림만 무려 150여 점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2017년 순복 씨의 그림을 눈여겨본 한 미술관 관장의 제안으로 첫 전시회까지 열었다. 삶의 무게에 지칠 때마다 잠든 어린 자식들의 귓가에 "엄마는 이다음에 그림 그리는 할머니가 될 거야"라며 속삭였던 순복 씨.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순복 씨의 그림 속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어느 고향에나 있을 법한 우리네 부모님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다리 아픈 아내를 위해 오늘도 경운기를 모는 아흔 살의 남편, 가끔은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난다는 아흔셋의 할머니, 서로를 소 닭 보듯 한다며 투덜대지만 한평생 갈라서지 못하고 살았으니 아무래도 천생연분인 것 같다는 노부부. 순복 씨는 이렇게 고향 마을 이웃들의 삶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누구도 주목해 주지 않았던 농촌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그림 속에서는 빛나는 주인공이 된다. 가족같이 지내며 서로서로 일손을 돕는 동네 할머니들 역시 순복 씨의 그림 속에 들어와 수다를 떨고 울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잊고 지냈던 고향의 풍경, 그리운 부모님의 얼굴이 순복 씨의 그림 속에서 되살아나 뭉클한 감동을 건넨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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