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11월 11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규탄하는 시위 모습(위)과 92년 11월 27일 당시 김영삼 대선 후보가 유세를 벌이는 모습.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에게 대선 자금 3000억 원을 지원했다고 밝혀 파장이 일고 있다. |
“집지하에 비자금을 보관하는 벙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돈을 내놔라.” 지난 2009년 1월 11일 자정을 넘어선 시각, 경기도 광주의 한 조용한 전원마을에 난데없이 괴한 30여 명이 나타났다. 이들이 굴착기까지 동원해 대문을 부수고 들어간 곳은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위 이 아무개 씨의 집이었다. 이 집 지하창고에 비자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정체불명의 집단이 용역업체 직원 20여 명까지 동원해 쳐들어온 것. 이 일당들은 집을 일일이 부수면서 지하 벙커나 비자금을 샅샅이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하자 이 씨가 갖고 있던 돈 30만원만 빼앗아 달아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한적한 시골 마을을 소란스럽게 만든 이 사건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통해 밝힌 정치권의 비자금은 과거 한국 정치사에서 관행처럼 이어져온 악행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나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액수가 제각각일 만큼 그 규모가 정확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비자금(secret fund)’이라는 말 그대로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관리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자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과정을 통해 전달되는지에 대한 세간의 호기심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선 정치자금법 개정 등을 통해 정치자금이 비교적 투명하게 운영되는 분위기이지만, 80~90년대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검은돈’이 정가로 흘러들어갔던 게 사실이다.
YS 정권 당시 최고위직에 있었던 한 전직 국회의원의 측근 A 씨는 기자에게 “선거 때가 되면 당의 각 지역 지부에 하루에 3000만~4000만 원씩 전달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A 씨는 또한 “사과박스에 담겨 전해진 돈을 자루에 옮겨 담아 보관했는데, 전국 각 지부에 하루에 전달되는 돈이 10억 원 이상에 이를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당시엔 이처럼 ‘뭉텅이 현금’이 당의 각 지부 사무실로 직접 전달되었을 정도로 비자금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렇게 박스에 담아서 공개적으로 유통되다시피하던 비자금은 1997년부터 은밀한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차에 거액을 비밀리에 실어 나르던 이른바 ‘차떼기’ 방식으로 비자금의 유통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던 시기는 1997년 대선 때부터였다.
강창희 전 의원 역시 2009년 펴낸 <열정의 시대>를 통해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차떼기를 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당시 자민련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강 전 의원은 “대통령 선거에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든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라며 “2002년 대선 후 한나라당이 소위 차떼기로 수백억 원의 부정한 돈을 기업으로부터 받은 사실이 드러났지만 차떼기는 이미 그 전부터 있었다. 이제는 10년 이상 지난 일이어서 기록으로 남겨도 될 것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강 전 의원은 비자금을 전달받은 경위에 대해서도 밝힌 바 있다. “하루는 국민회의 측 아무개 인사가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해 대낮에 그 집에다 차를 대고 실어왔다. 여러 개의 더플 백에 현금 10억 원을 넣어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주는데 차가 거의 주저앉을 정도로 무게가 나갔다”는 것의 그의 회고.
또한 강 전 의원은 “특이한 것은 국민회의 측이 준 돈이 모두 1만 원권 지폐였는데 전부 헌 돈이었다”며 “은행 띠지가 아닌 고무줄로 묶여 있었는데 현금 다발을 당 계좌에 입금시키기 위해 은행으로 가져가 기계로 세어보니 다 한두 장씩 모자랐다. 누군가 고무줄로 묶으면서 슬쩍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그 와중에서도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비자금을 관리했던 이현우 전 경호실장 역시 검찰 조사에서 기업으로부터 받은 비자금과 관련된 진술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전 경호실장의 진술 요지는 다음과 같다.
‘노 대통령 재임기간 중 300억 원 정도의 돈을 낸 기업은 삼성, 현대, 대우, LG, 롯데 등 5개 그룹이며, 200억 원 정도 낸 기업은 쌍용, 선경, 한진, 대림 등 4개 그룹, 150억 원 정도 낸 기업은 동부, 진로, 두산, 동아 한국화약, 풍산, 삼부토건, 태평양, 한보, 동양화학, 한양 등이며, 100억 원 전후를 낸 기업은 기아, 금호, 효성, 고려합섬, 한일합섬, 코오롱, 해태, 극동, 미원, 대농, 효성, 동국제강, 대한전선, 삼양사 등으로 기억된다.’
이 진술 내용에 따른다면,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대략 5300억 원 이상을 기업들로부터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재임 중 조성한 정치자금 외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전임인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선자금을 지원받아 선거를 치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인해 전직 대통령들의 비자금 수사가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비자금의 실체가 일부 드러난 적이 있었다. 직선제가 부활된 1987년 대선을 치른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지원한 1400억 원, 당에서 모은 500억 원 등 총 2000억 원을 썼다”고 밝힌 바 있기도 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선관위에 신고한 금액은 130억 원이었다.
1996년 초 노태우·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어 비자금 관련 조사를 받았을 때,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에서 ‘재임 중 4000억 원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으나, 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 당시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α’의 비자금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수천억 이상이 건네졌을 것이라는 의혹만 제기됐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통해 자신이 김 전 대통령에게 ‘3000억 원’을 건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 김영삼 전 대통령 측은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건네진 대선자금 관련 의혹에 대해 부인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도 회고록이 발간된 뒤 “그런 자금은 당으로 가지 후보가 개인적으로 받지 않는다”며 “후보에게 대선자금을 직접 전달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비자금 규모만 수천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이 포착한 규모만 수천억 원대에 이르며, 지난 97년 4월 검찰로부터 비자금 관련 뇌물죄로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대부분의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까지 미납액이 1672억 원에 이르는 상태. 재판 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했던 “내 현금재산이라고는 29만 1000원이 든 예금통장이 전부”라는 발언은 심지어 개그프로그램의 소재로 이용되었을 정도였다.
각 정권 때마다 정치자금을 ‘상납’하며 이권을 챙겨온 기업들 사이에서는 비자금 규모에 대한 눈치작전이 있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알아서 챙겨오라’는 식의 요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돈을 전하기 이전 기업 간에 금액을 적정 수준에서 조절하는 합의가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해마다 두 차례씩 20억~30억 원을 정치자금으로 헌납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그동안 수천 억대의 비자금 의혹이 제기돼 왔다. ‘DJ비자금’과 관련해서는 액수뿐 아니라 ‘미국 유출설’ 등 여전히 여러 의혹이 난무하고 있다. 또한 1997년 대선은 외환위기 와중에 치러졌음에도 상당액의 선거자금이 쓰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창희 전 의원은 ‘DJP 연합’ 당시 국민회의로부터 80억 원가량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책을 통해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자민련 측 선대본부장으로서 내가 지원유세 비용 등으로 국민회의로부터 받은 돈은 총 80억 원 정도였다. 놀랍게도 그 돈은 모두 현금이었다. 그만한 현금을 받으려면 차떼기 외에 방법이 없었다. 내가 국민회의 측 사람과 만나 차 트렁크에 넣어 실어오곤 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관위에 대선자금으로 신고한 금액은 261억 원이었으나 강창희 전 의원으로 인해 ‘80억+α’의 돈이 추가로 드러난 셈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에도 정치자금은 한바탕 정가를 시끄럽게 했었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기업들로부터 823억 원을 받았던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밝혀졌으나, 이 역시 전부는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내가 쓴 불법 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은퇴할 용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 조사 결과 실제로는 10분의 1을 초과하는 113억 원이 불법자금이라고 발표되었으나, 국민들은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규모에 더 놀라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정치자금은 주로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되었다고 한다. 앞서의 YS 측근 관계자는 “수백억, 수천억을 현금으로 보관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친인척 이외의 추적이 어려운 인물의 차명계좌 여러 개를 만들어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대통령들의 재임 기간 중 상당부분이 이미 해외로 빼돌려졌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정치비자금에 대해 “전직 대통령으로부터 건네받은 금액과 재임 기간 중 기업들로부터 모은 자금까지 더한다면, 비자금 규모가 지금까지 전해진 액수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자금의 총액을 알아내긴 어렵다. 교묘한 은닉 방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물고 물려 있는’ 정치권 돈의 흐름을 끊어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전두환 ‘뭉텅뭉텅’ 노태우 ‘찔금찔끔’
막대한 대선자금과 정치자금을 모아왔던 역대 대통령들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선거 비용으로 충당한 금액이 대부분이지만, 재임 중에 보여준 ‘씀씀이 방식’을 들여다보면 각 대통령의 스타일에 따라 ‘사용처’와 그 ‘방법’에 차이가 있었다.
가장 ‘통 큰’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손이 컸던 전 전 대통령은 장관이나 비서관에게 전별금으로 5000만 원씩 건네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비서관에게는 3억 원을 덤으로 얹어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에 의원들은 물론 정치권 밖의 이들에게도 두툼한 돈 봉투를 건네기도 했다고 하는데, 한번은 한 경제전문가가 청와대로 불려가 ‘억대 수표’를 받고 겁이 나서 회사에 기탁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은 ‘보스’ 기질이 다분해 군 시절에도 돈이 있어야 자기 세력이 따른다는 생각 하에 적극적으로 돈을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장관을 임명하며 수억 원을 ‘턱’ 건넬 정도로 화통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딴 생각하지 말고 국무에만 전념하라”며 봉투에 3억~5억 원가량의 거금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80년대 말의 화폐가치를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봉투에 받을 사람의 이름을 직접 쓰는 성의를 보이는가 하면, 여당뿐 아니라 일부 야당인사들과 군 인사들도 챙긴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 못지않게 기업들로부터 돈을 거뒀으면서도 씀씀이에는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명절 때 청와대 직원들에게 돌리는 봉투도 전 전 대통령 때보다 훨씬 적어 직원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또 비서관이나 장관들에게 주는 전별금도 수백만~1000만 원가량이어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비교’된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