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서 본 이리역 참사현장. 다이너마이트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가득실은 화차 1량이 폭발,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인근 9500여 채의 건물이 파손됐다. 사진출처=한국사진기자협회 보도연감 |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3분 경 이리역에서는 느닷없이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터졌다.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있던 한국화약의 화물열차가 폭발한 것이었다. 막걸리 한 되와 소주 한 병을 마시고 화차로 돌아온 화약호송원 신 아무개 씨가 촛불을 켜둔 채 잠이 든 것이 화근이었다. 신 씨는 술김에 덮고 있던 닭털 침낭을 찼는데 촛불이 침낭에 옮겨붙은 것이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열차에 실린 화약으로 옮아붙었고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열차는 폭발했다.
현장 상황은 전쟁 후 폐허를 연상시킬 정도로 참혹했다. 당시 이리역에는 지름 30m, 깊이 10m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고 이리역 주변 반경 500m 이내 9500여 채에 달하는 건물이 파손됐다. 역 주변을 지나던 행인이 파편에 맞아 사망하는가하면 30㎞ 떨어진 전주까지 폭발음이 들릴 정도였다. 전무후무한 참사로 59명의 사망자와 1343명의 부상자, 9973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당시 23억 원의 기록적인 재산피해를 냈다.
이 사고는 역 인근에 소재한 삼남극장도 초토화시켰다. 사고 당일 삼남극장에서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하춘화 씨의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사회자는 고 이주일 씨였다. 당시 삼남극장 영사실 기사로 모든 무대관리까지 도맡았던 유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춘화 씨가 ‘물새 한 마리’를 부르는 중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10m 높이의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수백 명의 관객들이 있던 극장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전이 돼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유 씨는 무대와 분장실 사이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무대와의 거리는 불과 4~5m 정도였다. 하 씨가 노래를 부르던 위치를 알고 있었던 유 씨는 사고 직후 감각을 이용해 더듬거리며 무대로 다가갔고 쓰러져 있는 하 씨를 찾아냈다. 하 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일으켜 세우려 하자 불안함을 느낀 그녀는 “누구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극장 직원이라는 유 씨의 말에 하 씨는 안도했고, 유 씨는 하 씨를 업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극장 앞 안전한 곳에 하 씨를 내려놓은 유 씨는 극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사회를 보던 이주일 씨를 비롯해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지포 라이터에 의지한 채 우선 이 씨를 찾았다. 천장이 완전히 내려앉아서 벽돌과 온갖 자재들을 파헤치면서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 온몸이 벽돌에 깔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 씨는 어둠 속에서 ‘춘화야! 춘화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잔해더미 속에서 그를 꺼낸 뒤 들쳐 업었다. 내 목과 등 전체가 끈적끈적하게 젖어드는 것으로 보아 이 씨는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리고 있는 듯 느껴졌다. 이 씨는 내게 몸을 맡기면서 ‘누구십니까. 춘화는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극장직원입니다. 하춘화 씨는 구출해서 극장 밖에 안전하게 모셔놨습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이 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게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이 씨를 업은 유 씨는 평소 익숙했던 극장 내부를 떠올리며 출구를 찾았고 그 와중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스태프진들과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인솔했다. 몇 명이나 살아남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다쳤는지 구분도 안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 탈출을 했다. 이 씨를 극장 앞에 내려놓은 유 씨는 다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극장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지은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깨끗했지만 사고로 건물잔해와 함께 천장 속에 있던 먼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으니 사람들은 회칠을 한 듯했다. 몇 사람을 구했는지 모른다. 극장 밖으로 실어나른 사람들의 생사나 부상 정도도 확인하지 못한 채 신들린 사람처럼 극장에 갇힌 사람들을 메거나 업어 날랐다. 건물이 계속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군인들이 도착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예산 7공수여단 부대원들이라 들었다. 나는 부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극장 내부구조를 설명해주고 도면까지 그려줬다.”
자칫했으면 당대 최고의 여가수와 훗날 코미디계의 황제로 군림할 거목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사고였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속에서 유 씨가 하 씨와 이 씨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눈 감고도 내부구조나 통로를 알 수 있을 만큼 극장 사정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유 씨는 톱스타를 비롯한 소중한 생명들을 구해냈다는 보람에 흐뭇했다고 한다.
▲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무너진 삼남극장에서 하춘화 씨와 고 이주일 씨를 구출했다고 주장하는 유이호 씨.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 씨 역시 생전에 하 씨를 구한 일화를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15세 연하인 그녀를 공주님처럼 모셨다. 지역 깡패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려면 우선 나부터 상대해야 했다. 이리역 폭발사고 때 나는 머리가 깨진 상태에서도 그녀부터 찾았다”라고 말했다. 또 이 씨는 “하춘화가 내 머리를 밟은 순간부터 머리카락이 나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 씨는 한 일간지 연재를 통해서도 자신이 하 씨를 구했다고 했다.
“전쟁이 난 줄 알았다.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극장 지붕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춘화 씨부터 찾았다. 불길이 치솟는 난로 옆에 그녀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도 머리에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지만 무조건 그녀를 업고 뛰었다. 그녀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쓰러졌다. 이때 14명이 죽었고 나는 뒷머리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유 씨의 증언은 완전히 다르다. “이 씨가 하 씨를 구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 씨에 이어 이 씨를 업고 나온 사람은 나다. 특히 당시 이 씨는 내가 구하기 전에는 벽돌에 깔려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 유 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유 씨는 왜 3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진실을 공개하는 것일까. 유 씨는 여러 번 사실을 알릴 생각도 했었지만 생색내기로 보일 것이 염려돼 침묵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고인이 된 이 씨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가 갈까 걱정도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하 씨가 방송에서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인간적인 섭섭함과 함께 이제라도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판단이 섰다고 밝혔다.
“본인들을 구해준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몹시 불편했다. 더구나 두 사람은 공인아닌가. 두 사람은 분명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둘 다 내 등에 업힌 채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극장 직원’이라고 얘기해줬다. 이 씨는 내게 하 씨의 안부를 물었고, 고맙다는 말도 했다. 또 내가 이 씨를 업고 나와 내려놓는 것을 먼저 구출됐던 하 씨가 지켜봤다. 그런데 극적인 요소 혹은 두 사람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 몰라도 매체에 나와서는 사실과 전혀 다르게 말했다. 이 씨는 하 씨의 생명을 구한 은인으로 영웅시되며 두 사람의 특이한 인연만 부각됐다. 지난해에는 한 방송에서 하 씨가 이리역 사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보고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내 이름과 번호, 사연을 담은 메모까지 전달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감감무소식이다. 그들을 비난하는 것도 생색내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진실은 진실 그대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하 씨의 측근은 12일 통화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간 언론에 나온 내용대로만 알고 있다. 지금 와서 누가 구했는지의 진실을 가리는 것이 중요한지 모르겠다. 본인에게 확인해야할 정도의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34년 만에 입을 연 유 씨의 주장이 사실일까, 또 유 씨의 주장에 당사자인 하 씨는 어떤 입장을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