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야권통합 추진기구 ‘혁신과 통합(가칭)’이 지난 17일 제안자 모임을 열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혁신과 통합’은 지난 8월 17일 ‘혁신과 통합으로 민주진보정부 수립하자’는 제목의 제안서에서 향후 활동 목표가 범야권 단일정당 건설임을 분명히 했다. ‘혁신과 통합’은 “연합정치의 진전으로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 만들어졌지만 지금의 정당구도로는 선거 승리와 선거 이후의 성공적 개혁을 보장할 수 없다”며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혁신과 통합’은 야권 대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이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를 겪으면서 기존의 선거연대와 후보단일화는 승리를 위한 완전한 방식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면서 이른바 ‘연합정당론’을 제시했다. 문 이사장은 “진보정당을 비롯해 민주당보다 세가 약한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흡수 소멸될 것이라는 의구심이 통합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며 “연합정당의 통합 방식은 각 정당들이 정파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민주당 야권통합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인영 최고위원이 주장한 바 있는 ‘정파등록제를 토대로 한 야권 대통합 정당 건설’ 주장, 김기식 ‘내가 꿈꾸는 세상’ 공동대표가 주창한 ‘빅 텐트(Big tent)론’, 문성근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의 ‘야권 단일정당론’ 등과 맥을 같이한다. 민주당과 민노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등 진보 개혁 성향 야5당이 통합정당을 건설하되 그 안에서 정파로 등록, 일정 부분 독립성을 유지하자는 구상이다. 거대한 통합정당 우산 속에 각 정파가 ‘당 내 당’ 형식으로 존재하는 식이다.
이인영 최고위원은 “총선에서 실시하고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비례대표 의석을 지역구 의석수에 따라 나누지 않고 정당득표율로 배분하는 제도)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공직 후보자나 당직자 선출 시 정파명부식 투표제를 도입한다면 소수정당이 민주당에 흡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요컨대 브라질 집권 노동자당(PT당)을 모델로 하는 정파등록제는 대통령제 하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일종의 ‘연립정권(연정)’ 구상인 것이다. 영국 일본 등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연정의 경우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이 개별적으로 후보를 내 총선을 치르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대통령제 국가인 한국의 특성에 맞춰 먼저 통합정당을 구성한 뒤 한나라당 후보와 1대1 대결을 펼치자는 게 정파등록제 구상이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민주당과 다른 정당들 간의 ‘표 나눠먹기’로 인해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얻는 일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혁신과 통합’ 참여자들과 “민주당 등이 총선과 대선에서 거대 여당인 한나라당을 고꾸라뜨릴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구상이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린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이 민주당과의 통합에 강한 거부감을 표하고 있는 데다 국민참여당도 이들 진보정당과의 통합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궁극적인 지향점과 정책, 정당구조 등 여러 면에서 민주당과는 화해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진보 정체성이 분명하고 진성당원(당비 내는 당원) 중심으로 운영되는 반면 민주당은 정체성도 모호하고 당원 구조도 후진적이며 당 운영도 비민주적이라는 얘기다. 한나라당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 하지만 통합은 불가하며 선거연합(후보단일화), 정책연합이 민주당과 함께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 급기야 이정희 민노당 대표는 민주당을 향해 “연합 관계를 이어갈지, 경쟁 관계로 갈지 선택하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국회 의석수가 민주당(87석)에 한참 못 미치는 7석에 불과한 민노당-진보신당이 야권 통합정당 구상의 실현 여부를 결정할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진보정당들이 ‘정체성이냐, 정권교체냐’의 만만찮은 질문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인영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2012년 정세의 엄중성과 정권 교체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감안해서라도 두 정당이 결단해야 한다”며 압박에 나섰다.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무리 지고지순한 정체성을 유지한들 무슨 소용 있느냐는 답답함이 묻어난다.
‘혁신과 통합’은 “시민들이 나설 때”라며 대국민 직접 호소에 나설 태세다. ‘혁신과 통합’은 “2012년 대격돌의 시기가 성큼 다가왔지만 정당들 간의 지루한 협상이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서 “고비마다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온 시민들이 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돌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는 28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야권 대통합 정당 건설을 촉구하는 국민운동 조직 건설 작업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의 현 지도부 임기가 12월 18일로 끝나는 데다 그때쯤이면 모든 정당들이 총선 공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야권 대통합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혁신과 통합’의 바람처럼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성공시켰던 ‘시민의 힘’이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의 극적 화합을 이끌어낼지 주목된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