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전의 검은 거래는 오래된 관행이다. 곽노현 교육감 의혹도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터진 것뿐’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상처가 깊어 곪을 대로 곪은 고름이 터진 것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선거전에서의 검은 거래는 하루 이틀 이어져온 것이 아닌 오래된 관행으로 정치판의 씁쓸한 현실이기도 하다. 실제로 교육감 선거뿐 아니라 총선과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등에서도 이러한 뒷거래가 횡행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권에 오랫동안 몸담아오며 여러 차례 선거전을 경험한 전직 국회의원 보좌관 등의 증언을 통해 정치권의 ‘후보단일화 뒷거래’ 실체를 추적해보았다.
“후보 사퇴 압박은 선거 때마다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현상이다. 후보자 등록 이전에도 ‘누가 출마 한다더라’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유력 후보의 참모들이 알아서 찾아가 ‘출마하지 말라’는 압박을 하기도 한다. 대신 다음 선거에서 ‘밀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번에 곽노현 교육감은 돈을 준 증거를 남기는 어설픈 뒷거래를 했기 때문에 발각된 것이다. 선거판에서 오래 일해 본 이들은 돈을 건네는 과정에서 꼬투리를 잡힐 만한 증거는 절대 남기지 않는다.”
20년 넘게 정치권에서 일해 왔고, 의원 보좌관을 거쳐 직접 지방선거에 출마했던 경험이 있기도 한 L 씨는 ‘곽노현 사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L 씨는 현재 내년 총선 출마를 계획하고 있는 정치권 인사를 돕고 있다. 지난 해 지방선거에서도 서울시내 한 지역 구청장 선거 후보 캠프에서 일했던 L 씨는 당시 겪은 일화를 털어놓았다.
그곳은 한나라당 유력 정치인의 지역구였다. L 씨는 “그때 지역구 의원이 비공식적으로 지원하는 후보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만 7~8명의 후보가 난립하고 있었는데 결국 하나 둘씩 출마를 포기하더라. 나중에 그 의원이 자신이 미는 후보를 돕기 위해 물량 지원을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고 전했다. “물량지원이라는 것이 ‘돈 전달’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L 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곳 구청장 선거에서는 해당 지역구 의원이 지원했던 인사가 결국 당선되었다고 한다.
현역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또 다른 인사 H 씨는 후보매수 과정에서 사퇴 조건으로 어떤 내용들이 요구되는지 들려주었다. H 씨는 “사퇴조건으로 돈거래는 물론 산하 단체나 기관장 자리 등을 보장해 주는 식의 협상이 이뤄지는 건 흔한 일이다. 돈만 놓고 보더라도 ‘선거 비용만 보전해주고, 내 밑에서 일하던 애들만 캠프에 넣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양심적인 경우이다. 보통은 이 조건에 공식 선거기탁금 외에 선거에 들어간 각종 경비까지 요구한다. 그리고 간혹은 여기에다 이른바 ‘부가수익’까지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당선 이후 얻게 될 지위와 특혜까지 감안해 웃돈을 달라고 하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뒷거래에 들어가는 돈의 액수는 선거기탁금 외에 사퇴 후보자의 지지율이나 지역에서의 영향력 등을 감안해 정해지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지난해 6·2 지방선거 당시 후보 등록 이후 사퇴한 사람들은 모두 87명이었다. 이들의 사퇴사유는 ‘일신상의 사유’가 대다수였고 ‘후보단일화’를 이유로 밝힌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를 전해준 관계자들 모두 ‘일신상의 사유’를 들어 사퇴한 경우에도 사퇴 대가를 받고 물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후보등록 이후 사퇴하면 선거기탁금뿐 아니라 선거운동비용도 모두 날린다. 보통 억 단위의 돈을 날리게 되는 것인데 아무 조건 없이 사퇴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전하기도 했다.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서울시 교육감 돈 선거 파문을 바라보는 여야의 시각은 서로 다르지만, 선거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뒷거래를 바라보는 양 쪽의 시각은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돈거래 없는 깨끗한 선거를 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대다수 인사들의 생각이었다. 후보단일화 과정에 전반적으로 뒷거래가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심지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곽노현 교육감은 아마추어적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단일화 뒷거래’가 당연하고 일반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 정치권의 씁쓸한 어제와 오늘 자화상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YS 결심 얻었다” 서석재 파문
과거 선거에서도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매수 사건으로 인해 파문이 불거진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는 지난 1989년 강원 동해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벌어진 후보매수 파문. 당시 김영삼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의 서석재 후보가 경쟁 상대였던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홍섭 후보는 당시 “민주당 서석재 총장이 동해 망상 해수욕장 부근 솔밭에서 자신을 매수하면서 ‘김영삼 총재의 결심을 얻은 일’이라고 말했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린 서석재 전 의원이 구속되었을 때 YS가 홀로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난 2009년 고인이 된 서석재 전 의원은 당시 이 일로 인해 의원직을 잃고 한동안 정치권 밖에서 외유를 해야 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때는 이대엽 전 성남시장이 당시 이관용 후보를 매수했다는 혐의가 제기돼 파문이 일었다. 당시 이관용 후보는 출마포기 대가로 5억 6000만 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양측은 극구 부인했었다. 결국 이대엽 전 시장은 선거운동 중 돼지고기 편육과 격려금 등을 기부한 사실이 밝혀져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고 당선 무효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2010년 12월에는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검찰이 이 전 시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시가 1000만 원이 넘는 ‘로열살루트 50년산’ 위스키가 나오면서 시민들은 크게 분노하기도 했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도 현 전북도의원인 K 씨의 동생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예비후보에게 불출마 대가로 2000만 원을 건넸다가 징역 1년형을 받은 바 있다. 당시 K 씨 동생 측은 ‘도의원 후보 등록을 포기하는 대가로 4000만 원 제공을 먼저 요청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실형을 선고했다. 또 지난 2006년엔 밀양시의원으로 당선됐던 이동수 전 의원이 다른 후보에게 1000만 원을 건넸다가 벌금형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이 전 의원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순수한 마음에서 도와준 것’이라고 곽노현 교육감과 비슷한 주장을 하며 상고했지만, 결국 대법원으로부터도 형을 확정 받았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