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역할론 수용 경우 다시 심판대에…당 주도권 놓고 ‘명낙대전’ 재연 가능성도
3·9 대선에서 패한 여당이 혼돈에 휩싸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비롯해 총사퇴한 송영길 지도부, 친문(친문재인)계,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 등 사실상 전 계파가 단두대에 올랐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한 민주당 의원 172명 전원이 책임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대선 패배 책임론을 둘러싸고 친명(친이재명)과 친낙(친이낙연)이 정면충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친문계의 ‘이재명 고립작전’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
패장인 이재명 후보 향후 입지를 놓고 민주당 내부에선 전망이 엇갈린다. 둘 중 하나다. ‘여기까지냐, 재기냐’다. 중간항은 없다. 전자에 베팅을 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비주류 이재명’이다. 이 후보는 민주당 역사상 주류와 결이 다른 대선 주자였다. 친문은커녕 비문(비문재인)계에 속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에 치른 2007년 대선에선 친노(친노무현)계와 대척점을 형성했던 정동영 후보 선거대책위원회(비서실 수석부실장)에 몸을 담았다. 정동영 팬클럽인 ‘정통들(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민주당 정통성과 거리가 먼 이 후보가 본선에 진출했을 때부터 “패배하면 후일을 담보할 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일부 인사들은 대권 재수생인 문재인 대통령 사례를 들어 이 후보의 재기 가능성에 베팅을 걸지만, 당 최대주주였던 문 대통령과 변방의 아웃사이더 이 후보가 처한 정치적 상황은 백팔십도 다르다. 18대 대선에서 패한 문 대통령의 경우 당 최대 계파인 친노계가 호위무사 역할을 자처했지만, 이 후보는 당 권력서열상 성골·진골보다는 6두품에 가깝다. 여권 한 관계자는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이재명계로 불리는 의원들이 50명 안팎으로 늘어났지만, 결속력이 있겠나”라고 반문하며 “급조된 계파는 (필연적으로) 급락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재명 한계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는 대장동 의혹 등에 대한 검찰 수사다. 그는 1월 22일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한 연설에서 “제가 지면 없는 죄로 감옥에 갈 것 같다”고 했다. 윤 당선인의 보복 수사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지만, 선거 기간 정국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연설을 두고 민주당 내부에서도 “쥴리 의혹을 부인한 김건희(윤 당선인 부인)의 판박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쥴리 의혹을 담은 이른바 ‘X파일’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7월 김건희 씨는 인터넷매체 ‘뉴스버스’와 인터뷰에서 “나는 쥴리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당시 ‘프레임’ 내용을 담은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언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면 더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며 “(쥴리 의혹을 부인하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대장동 의혹에 대한 특별검사(특검)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사정당국이 언제든지 수사 카드를 쥘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정치권 안팎에선 ‘강골 검사’ 출신 대통령이 출범했는데, 이 전 후보 입지가 온전하겠냐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반론도 있다. ‘대선 블랙아웃(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 전까지 열세였던 이 후보는 불과 0.73%포인트(p) 차로 석패했다. 이전 역대 최소 격차인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40.27%)과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38.74%)의 격차인 1.53%p의 절반에 불과하다. 여론조사 한 관계자는 “대선 개표 직전까지 5%p 정도로 윤 당선인이 앞설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예측이 빗나갔다”고 했다.
여권에서도 “이 후보가 비교적 선전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 후보가 오롯이 책임론을 뒤집어쓸 일은 없다는 뜻이다. 1964년생인 이 후보의 나이도 비교적 젊다. 그는 대선 막바지인 3월 4일 “저는 정치를 끝내기에는 아직 젊다”고 했다. 당시는 윤 당선인의 승리를 예측하는 이들이 많았을 때다. 이번 선거에서 패해도 정치적 은퇴는 하지 않겠다는 시그널을 드러낸 셈이다.
관전 포인트는 패장 이 후보의 ‘정치적 진로’다. 크게는 △지방선거 지휘 및 출마 △선 당권 도전 후 대권 재도전 △22대 총선 출마 등으로 나뉜다. 이 후보는 당장 석 달 앞으로 다가온 6·1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라는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이재명 역할론’이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석패한 이 후보의 득표수는 1614만 7738표로, 역대 민주당 계열 대선 후보 중 단연 톱”이라며 “지방선거 출마자들이 이 후보에게 선거 유세를 직간접으로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이 후보 총득표수는 문 대통령이 18대 대선 때 얻은 득표수(1469만 2632표)보다 145만 표가량 많다.
이 후보가 ‘지방선거 역할론’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3·9 대선에 이어 또 한 번 정치적 심판대에 오를 전망이다. 이 후보가 심판이 아닌 선수로 뛸 수도 있다. 당 내부에선 ‘서울시장 출마설’ ‘경기도지사 재출마설’ 등이 나돌고 있다. 이 두 시나리오가 현실화하지 않을 땐 ‘당권 도전’에 나설 수도 있다. 이른바 ‘문재인 모델’이다. 문 대통령도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오른 뒤 2017년 5·9 대선에서 승리했다. 앞서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도 2020년 8·29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거머쥔 뒤 이듬해 대선 경선에 도전장을 냈다. 친문계 한 의원은 “선 당권 후 대권 플랜은 대권 주자의 단골코스”라고 했다.
변수는 당 내홍의 강도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직후 ‘질서 있는 퇴로냐, 비상대책위원회냐’를 놓고 소용돌이에 빠졌다. 노웅래 의원을 비롯한 일부 중진들은 ‘질서 있는 퇴각’을 주장했지만, 송영길 지도부는 3월 10일 비공개회의 끝에 총사퇴를 결의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카드를 꺼냈다. 이 후보가 패한 지 하루 만이다.
송 대표는 “투표로 보여준 국민 선택을 존중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평소 책임정치 강조해왔기에 당 대표로서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자 한다”고 했다. 송 대표뿐 아니라, 최고위원도 동반 사퇴했다. 다만 윤호중 원내대표는 오는 8월 전당대회 때까지 ‘비대위원장’을 맡아 당 내홍 수습에 나서기로 했다. 당 인사들은 “외부 수혈 중심의 혁신 비대위가 아닌 관리형 비대위를 통해 패배에 따른 당 출혈을 최소화하겠다는 의미”라고 부연했다.
하지만 당 내홍이 조기에 수습될지는 미지수다. 관리형 비대위를 띄운 민주당은 새 원내사령탑 경선을 조기에 치른다. 윤석열 정부 첫 카운터 파트너를 결정하는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은 3월 25일 이전에 마무리할 예정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지 보름 만에 당내 권력을 둘러싼 진검승부를 펼치는 셈이다. 당내에선 4선의 안규백, 3선의 박광온 박홍근 홍익표 의원 등이 후보군에 올랐다. 계파로 보면 친낙에 속하는 범친문(박광온 홍익표), 정세균계(안규백), 친명에 가까운 옛박원순계(박홍근)의 대결이다.
대선 패배 후 열리는 첫 당내 경선의 관전 포인트는 ‘이재명 이낙연 리턴매치’ 여부다. 오는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명과 친낙계가 강대강 전선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이낙연 전 대표가 전면에 등장한다면, 포스트 대선 정국에서 이 후보와 다시 맞붙을 것으로 보인다. 친낙 중심의 권력재편을 노리는 이 전 대표와 대선 이후 재기를 모색하는 이 후보의 사생결단 싸움이다. 여권 한 인사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양측이 전략적 휴전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이후 당권 경쟁 과정에서 갈등이 증폭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결국 친문 직계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핵심”이라고 했다.
당 내부에선 대선 패배 원인을 놓고도 ‘친문계의 소극적 지원’ ‘송영길 리스크’ ‘이재명 리더십 부재’ 등 백가쟁명 식 논쟁을 펼치고 있다. “전통적 친문계가 밑바닥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다 아는 사실(민주당 A 인사)” “조직력이 제대로 가동 안 됐는데도 이재명 인물론으로 버틴 것(민주당 B 인사)” 등 당 주류로 화살을 돌리는 발언도 적지 않다. 향후 ‘대선 패배 백서 발간’ 과정에서 친문 책임론이 불거질 개연성이 크다는 점을 예고한 대목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여권 내부권력 투쟁의 핵심 변수다. 허니문 기간에 협치·통합 행보에 적극 나서는 윤 당선인과 민주당 친낙계가 연대 전선을 펼 경우 ‘이재명 고립 작전’은 정국 변수로 튀어 오를 수밖에 없다. 윤 당선인으로선 협치 물꼬를 트고, 친낙으로선 최대 정적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양측의 이해관계가 들어맞는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한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40%대 지지도는 친낙계의 든든한 지원군”이라며 “친명과 친낙이 강하게 맞붙을 때, 당내 세력이 약한 이 후보가 이를 어떻게 돌파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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