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남자 태권도 74kg급 국가대표 장경훈(왼쪽) 등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총재 물러나라’ VS ‘태권도 죽이는 처사’
먼저 흥미로운 것이 있다. 국기 태권도와 관련된 문제이고, 그것도 대한민국 서울에서 송사가 진행 중인데 국내 주류언론에는 이와 관련된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 이른바 태권도 전문지들만 조심스럽게 이를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라저스트 측은 “법원의 판결문까지 나온 상황에서 언론의 반응이 없으니 힘들다. 아무래도 WTF가 상대적으로 강자이고, 언론에 대한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태권도 전문지들의 경우 업계 광고수주 등의 문제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지적했다.
반면 WTF의 강석재 홍보부장은 “2013년 태권도의 미래가 걸린 올림픽 잔류 여부에 대한 IOC 결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언론이 내용을 다 알면서도 큰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참는 것”이라며 국익론을 내세웠다. 또 이에 대해 라저스트는 “태권도에 대한 열의가 없었다면 그동안 수백억 원을 들여 이 사업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잔류하기 힘들다. 진정 태권도가 전 세계인의 스포츠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능력한 현 WTF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받아쳤다.
한편 이와 관련해 주목을 끄는 것은 최근 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이 문제의 심각성을 주목해 이미 양측을 취재했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개요
태권도는 한국의 국기로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이 국제 스포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첫 선을 보였고, 2004년 아테네, 2008년 베이징까지 3회 연속 전 세계인의 스포츠로 올림픽 무대에 올랐다. 태권도는 역사상 최단기간에 올림픽 종목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그늘도 있었다. 바로 심판판정 문제였다. 3번의 올림픽 모두 현장에서 판정시비가 발생했다.
이에 WTF의 조정원 총재는 아테네올림픽 직후 ‘전자호구 도입’을 공식 천명했다.
WTF는 2005년부터 전자호구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독점공급업체 선정에 나섰다. 라저스트, 아디다스(독일), 대도(스페인) 3사가 뛰어들었고, 이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심사, 공개시연회, 공인테스트 등을 통해 라저스트가 단독으로 WTF 전자호구 공인업체로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은 2006년 9월에 맺어졌지만 계약기간은 2007년 5월부터 2012년 5월까지였다. 5년간 공인료는 100만 달러였고, 라저스트는 WTF 주최대회와 WTF 승인대회에 모두 독점적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공급할 권리를 획득했다. 당초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사용이 목표였지만 일부 기술적 결함과 심판교육, 운영상의 문제로 전자호구 도입은 미뤄졌다. 라저스트 측은 이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완성도 높은 제품과 운영시스템을 갖췄고, 각종 국내외 태권도 대회에 자사제품을 공급해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WTF와 라저스트의 작은 의견충돌은 있었지만 2009년 코펜하겐 세계선수권대회에 라저스트 제품이 사용되는 등 WTF와 공인 전자호구업체의 협력은 비교적 큰 탈이 없이 진행됐다.
문제는 2010년 초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1월 WTF와 라저스트는 계약서 중 제2조 독점스폰서 조항을 삭제했다. 라저스트는 계약서 변경에 동의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을 받아 굴복했다고 하고, WTF는 라저스트사 제품에 문제가 있을 경우 대안이 없기에 복수의 공인업체를 선정해 선의의 경쟁을 유도한다는 취지에 양측이 공감했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2010년 2월 WTF는 대도를 두 번째 전자호구 공인업체로 선정했다. 이후 라저스트와 WTF의 갈등은 조금씩 깊어졌다. 라저스트는 계약에 따라 제품에 큰 하자가 없는 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자사의 전자호구가 사용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반면 WTF는 ‘전자호구 사용 권리는 대회를 주관하는 조직위에 있다’는 등의 내용을 언론을 통해 알리면서 라저스트를 자극했다. 2010년 월드컵 대회 때 대도의 제품이 사용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으나 최종 라저스트 제품이 쓰였고, 광저우아시안게임 때도 라저스트 사의 제품이 성공적으로 쓰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 지난 2007년 제88회 전국체전 태권도 남자고등부 플라이급 경기에서 전자호구를 착용한 부산 고성원(홍)과 인천 황인하가 발차기를 주고받고 있다. 연합뉴스 |
이후 2011년 5월 1일부터 6일까지 열린 경주 세계태권도대회에서 라저스트의 전자호구는 초미의 관심을 받으며 사용됐다. 라저스트는 “제품문제가 아닌 운영상의 작은 에러가 발생했지만 조정원 WTF 총재가 가장 성공적인 대회라고 평가할 정도로 제품의 품질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올림픽을 1년여 앞둔 시점에서 세계 각국에서 라저스트 사의 제품 구매를 위한 상담이 쇄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5월 18일 스위스 타이밍 사는 라저스트 제품 대신 대도의 전자호구를 사용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WTF는 이를 즉시 발표했고, 6월 30일부터 7월 1일까지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의 바쿠에서 열리는 런던올림픽 세계선발전에도 대도의 전자호구를 채택했다. 이에 라저스트는 바쿠 대회 타사 제품 사용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이것이 서울중앙지법 제50 민사부에서 받아들여졌다(사건번호 2011카합1466). 이로 인해 바쿠에서는 전 세계 태권도 대표선수들이 전자호구 대신 기존의 일반호구를 하고 경기를 치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어 라저스트는 조정원 총재와 양진석 WTF 사무총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고, 수원지법 안양지원에서 WTF 은행통장 등에 대해 40억 원 가압류를 신청해 역시 받아들여졌다(사건번호 2011카단 100656). 라저스트의 법적 대응에 WTF는 7월 28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라저스트와 맺었던 전자호구 공인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친다
사건이 복잡해보이지만 양측의 대립점은 비교적 단순하다. 먼저 WTF는 원래 예정대로 라저스트 제품을 올림픽에서 사용하려고 했으나 제품에 큰 하자가 발생했고 LOCOG도 이를 인정한 만큼 라저스트의 제품을 런던올림픽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공인계약 취소는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라저스트가 각종 고소, 고발을 제기하며 문제를 일삼았기 때문에 타협이 이뤄지지 않는 한 계약서 제12조를 근거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다. WTF의 서정강 경기부장은 “업무를 담당할 실무자로서 WTF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다. 법원에서 가처분, 가압류가 받아들여진 것은 WTF의 바쁜 일정상 소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라저스트는 “분노가 치민다. 제발 많은 태권도인들이 법원 판결문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WTF의 해명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법원에서 다 판단했다. 라저스트의 제품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전자호구다. 기술자들이 다 안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WTF 집행부 중 몇몇 인사가 대도와 결탁해 있을 수 없는 일을 꾸민 것이다. 라저스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와 태권도가 바로 서기 위해 WTF 집행부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측의 싸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라저스트 제품의 성능이다. 문제가 없다면 WTF가 불순한 의도로 트집을 잡는 것이고, 성능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라저스트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먼저 WTF 측은 경주 세계대회에서 라저스트의 전자호구가 수십 차례의 문제를 야기했다고 강조했다. 그 근거로는 “전자호구 특별위원회의 판단, 총재 주변의 조언, 모 대학 교수의 분석” 등이라고 답했다. 또 주먹타격센서의 방수기능에도 문제가 있고, 심지어 무선시스템에 약점이 있는 라저스트가 경주 대회 때 문제가 생기자 급하게 무선통신 사용 자제를 알리는 안내문을 경기장 이곳저곳에 붙이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라저스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쩍 뛴다. 라저스트의 김종대 부회장은 “WTF가 선정한 소프트업체와의 네트워킹을 하는 과정에서 전파방해로 인해 4차례 문제가 있었고, 마지막 날 사람(시스템 운영상)의 실수가 발생했을 뿐이다. 특히 네트워킹 문제의 근본원인은 한 스페인의 인터넷 언론이 현장 생중계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현장에서 시정한 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정원 총재도 전자호구에 문제가 없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라고 역설했다. 이에 WTF의 강석재 홍보부장은 조정원 총재 등의 성공적인 대회였다는 평가는 “대회 전반에 대한 평가였고, 기술적으로 대회를 주최한 단체의 수장으로 대회를 폄하하기는 어려운 일 아니냐”고 반박했다.
두 번째 런던올림픽조직위원회를 대변하는 스위스 타이밍 사의 결정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WTF는 올림픽 용품 사용에 대한 결정권은 조직위원회, 그리고 실무를 대행하는 스위스 타이밍 사에 있는 것으로 그 결정을 존중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라저스트는 1월 통상적으로 용품사용은 국제경기단체(IF)의 지명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고, WTF가 대도를 밀었기 때문에 나온 결정이라고 문제를 삼았다. 특히 2011년 1월 처음 스위스 타이밍 사가 라저스트를 공인했을 때는 즉각 발표하지 않았다가 5월 대도를 선정했을 때는 당일 발표를 하는 등 행정 절차에서 그 불순함이 나타났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WTF가 IOC의 규정(영문)을 왜곡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WTF 측은 “라저스트가 직접 IOC와 스위스 타이밍 사에 질의를 보냈고, 이에 대해 이해할 만한 내용의 답변이 왔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시끄럽게 만드는 것 자체가 태권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응수했다. 또 1월 즉각적인 발표를 하지 않은 것은 라저스트와의 계약연장 건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라저스트의 김종대 부회장은 “WTF의 해명은 이미 법원의 가처분 및 가압류 결정과정에서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정말 궁색한 변명이다. 9월초 조정원 총재 개인 재산에 대해서도 가압류를 걸 것이다. 물밑으로 올림픽 채택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겠다는 제의도 왔지만 거절했다.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WTF의 서정강 부장도 “라저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업무진행 상에서 WTF는 문제가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것은 내가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일요신문>은 양측이 공개한 자료를 모두 확인했다. 기술적인 문제와 IOC 규정의 해석문제(예컨대 추천recommand과 지명 nominate의 차이) 등 아주 구체적인 논쟁도 파악했다. 하지만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고, 성급히 결론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사화는 자제하기로 했다. 확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개입하는 등 이미 문제는 불거질 대로 불거졌고, 향후 더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태권도의 올림픽 잔류를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모두가 납득할 만한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도덕성이 드러나 WTF 집행부가 교체되거나, 아니면 라저스트가 기업의 이윤을 위해 태권도를 망쳤다는 비난과 함께 도산하는 등 두 시나리오 중 하나는 현실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