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물가는 더욱 좋지 않다. 1∼7월까지 소비자물가는 4%대의 고공행진을 해왔다. 8월에는 아예 물가 상승률이 5.3%까지 치솟았다. 정부가 정한 물가상승률 전망치인 4.0%에 맞추려면 9∼12월까지 4개월간 물가는 3.0%로 잡아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의 경제계 원로는 “정부가 밝히는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치에는 정책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쉽사리 바꾸기 어려운 점을 이해하지만 연초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폭 수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면서 “이겨낼 수 있다고 국민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경제 상황이 정말 어렵다고 인정하는 것도 이에 못잖게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경제 운용에서 운신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성장이나 물가 모두 정부만의 잘못으로 귀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경제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도움을 요청한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2009년 2월 윤증현 전 재정부 장관의 대폭적인 경제성장률 전망치 하향 조정이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재정부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받은 윤 전 장관은 취임 후 바로 경제성장률을 내리는 일부터 착수했다.
그는 취임일성으로 “2009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3% 내외에서 마이너스(-) 2% 내외로 수정한다”고 선언하면서 “상당히 부담스럽고 마음이 무겁지만 신뢰 회복의 첫걸음은 정직성”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길은 지난했지만 정부의 경제위기에 대한 정직한 고백은 정부와 국민들이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그 결과는 2009년에 정부가 예상한 마이너스가 아닌 0.3%라는 플러스 성장률로 돌아왔다. 당시 미국이 -2.6%, 일본 -6.3%, 유로권 -4.1% 등 대부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현 상황이 당시와 다른 점은 그때는 성장만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성장뿐 아니라 물가까지 골칫거리가 됐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현재 재정부는 아직까지 올해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등 대표적인 거시경제 지표를 수정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를 고수하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1일 발표된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3%로 3년 만에 최고치를, 8월 무역수지는 8억 달러 흑자로 19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무역수지는 적자가 예상됐으나 막판에 드릴쉽 2대(14억 달러)가 수출되면서 간신히 흑자가 됐다.
고물가 저성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이날 임종룡 기획재정부 1차관(현 국무총리실장)이 기자실에 내려와 현재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가졌다. 당시 임 실장은 “8월 무역수지 감소는 일시적이고 계절적인 요인이지 수출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계절적 요인으로 10∼12월 흑자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연간으로 볼 때 무역수지 흑자 달성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본다”면서 “다만 기본적으로 물가 여건이 쉽지 않으며, 물가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서민 부담이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정부가 최선을 다하겠고, 9월에는 물가 여건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치 수정 여부를 묻는 질문에 그는 “현재 정책 기조를 유지한다. 지금 글로벌 재정위기로 신흥국, 선진국 경기가 안개 속을 헤맨다고 할 정도로 요동치고 있다. 현재 기조를 유지하지만 변화하는 국제환경, 정책 대응을 보면서 실기하지 않도록 하겠다”면서 “현재는 더 많은 노력을 할 때이지 수정하거나 할 단계가 아니다”고 답했다.
정부가 이처럼 기존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고수하고 있지만 세계적인 투자은행들은 이미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대폭 조정하고 있다. 8월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에 대한 전망치는 서로 역전된 상황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9개 글로벌 투자은행의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 평균은 8월 말 현재 4.0%로 조사됐다. 이에 반해 물가상승률 전망치 평균은 이보다 높은 4.2%로 나타났다.
세계 경제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국제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글로벌 투자은행의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매달 하락하고,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상승해왔지만 두 수치가 역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월 말 글로벌 투자은행의 우리나라 평균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4.2%,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4.0%였다. 8월 들어 미국 국가신용등급 강등으로 세계 경제 성장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하향 조정됐다. 반면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최근 소비자물가가 5%대를 뛰어넘는 고공행진을 거듭하면서 상향 조정된 것이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올해뿐 아니라 내년도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하향 조정했다. 7월 말 현재 9개 글로벌 투자은행의 내년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평균 4.4%였으나 8월 말에는 4.2%로 낮아졌다.
이에 대해 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성장률만의 문제라면 일부 수정할 수 있지만 물가는 수정하기가 어렵다. 현재 4.0%인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지켜내기 어렵다고 정부가 고백할 경우 물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면서 “물가는 심리적인 면이 큰데 상황이 어렵다고 하면 너도 나도 올리려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면 물가를 안정시킬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거시경제 지표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