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금실 법무부장관(왼쪽), 추미애 의원 | ||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정작 당사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는 차기 지도자감으로 두 사람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각 여론조사 기관들이 최근 잇따라 발표하고 있는 차세대 정치지도자에는 강 장관과 추 의원이 늘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항상 강 장관이 한 걸음 앞서는 양상을 보이고, 그 뒤를 추 의원이 따르고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정치권에서는 “차세대 여성 지도자로 강 장관이 추 의원을 이미 추월했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지난 5월30일자 <문화일보>의 칼럼‘강금실과 추미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강 장관을 ‘뜨는 자’로, 추 의원을 ‘쫓기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에 의해서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되었던 추 의원의 최근 하락세보다는 비정치적 인물이랄 수 있는 강 장관이 여성 정치인의 선두주자로 떠오른 것에 더 주목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최근 추 의원이 보이고 있는 노 대통령과의 거리 두기가 강 장관의 부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는 추측마저 낳고 있다. 과거 DJ의 추 의원 ‘내리사랑’에 못지 않게 오늘날 노 대통령의 강 장관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95년 추 의원이 10여 년간의 판사 생활을 청산하고 정계에 입문한 데에는 강 장관의 추천이 작용했다는 내용이다.
강 장관은 57년생으로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사시 23회 출신이다. 추 의원은 58년생으로 대구 경북여고와 한양대 법대를 졸업했다. 사시 24회 출신이다. 모든 면에서 강 장관이 추 의원보다 1년 선배인 셈이다.
강 장관은 80년대 말 약 2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울지법과 고법 등 중앙에서 근무했다. 반면 추 의원은 춘천 인천 전주 광주 등 지방근무만 했다.
▲ ‘법의 날’ 기념오찬에서 건배를 하는 강 장관과 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여성 법조계에 밝은 한 여성 변호사는 “여성법조인들이 희소성 때문에 잘 만날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못하다. 더군다나 판사들은 그 신분의 특성상 사람 만나는 것을 다소 금기시하는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강 장관은 다소 외향적인 성격이었고, 추 의원은 내실을 다지는 성격으로 알고 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강 장관과는 좀 친했지만 추 의원은 전혀 몰랐다. 강 장관이 서울근무가 많았던 반면, 추 의원은 지방근무가 많았던 면도 작용했을 것이고 두 사람의 성격탓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판사시절 불법시위혐의로 검거된 학생들의 구속영장을 잇따라 기각시키는 등 소신있는 판결을 해온 강 장관도 지난 86년 불온서적 사건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는 등 강단있는 판결을 하는 후배 추미애에 대한 소문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추 의원이 처음 정치권에 입문하게된 것은 15대 총선을 앞둔 95년 8월. 당시 광주고법에 있던 37세의 추 판사는 김대중 신당을 준비하던 정대철 의원측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법조인과 정치인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8월27일 DJ를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점심식사를 같이한 추 판사는 DJ의 청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길로 광주에 내려가서 사직서를 던졌다.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다시 복귀한 DJ의 당시 명분은 상당히 궁색했다. 당시 민주당의 노무현 부총재도 DJ의 정계 복귀를 비난했다. 구시대 정치라는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DJ는 당시 젊고 참신한 신진인사 영입에 사활을 걸었다.
▲ 지난 95년 국민회의 부대변인 임명장을 받는 추미애 의원 (왼쪽)과 DJ. | ||
하지만 당시 DJ의 신당 창당 작업은 정치적 아성인 호남권을 제외하고는 비난 역풍이 거셌다. 역시 당시 신당측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은 한 여성변호사는 “정치에 별 뜻이 없기도 했지만, 대권 사수를 위해 다시 복귀를 선언한 DJ 신당에 입당할 명분이 없어 고사했다”고 밝혔다.
95년 당시에도 강 판사는 정계에 입문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고, 반면 추 판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추 판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초기 YS의 개혁성향이 갈수록 퇴색하는 것을 보며 울분을 느끼던 때였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 상황에서 강 판사가 과연 자신의 고사와 함께 후배인 추 판사를 추천했는지, 그리고 그 추천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법무부 공보관실의 한 관계자는 “그 칼럼을 장관님도 직접 봤다. 하지만 ‘사실이다 아니다’라는 말씀은 없었다”고 밝혔다.
추 의원측은 이 문제를 거론하는 자체에 대해 다소 불쾌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항간에 떠도는 강금실·추미애 경쟁설에 대해 추 의원측은 “그런 표피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기가 곤란하다”고 밝혔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단정할 순 없지만, 당시 강 장관이 주변 법조계 후배들 몇몇을 개인적 소견으로 추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추 의원도 포함됐으리라고 본다”고 밝혔다.
또다른 한 관계자는 “DJ에게는 분명 당시 강 장관보다는 TK(대구·경북) 출신인 추 의원쪽이 더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에게는 강 장관의 폭넓은 법조 인맥이 더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향후 강 장관과 추 의원의 경쟁적 관계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