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10월 26일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28주기 추도식. 오른쪽부터 박근혜 전 대표, 박지만 회장과 부인 서향희씨, 박근령 씨. 원 사진은 박근령 씨 남편 신동욱 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박정희가의 첫 번째 비극은 부인 육영수 여사의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가난하고 암울하던 시절 육 여사는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육 여사는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에 저격당했다.
사건 당일 연단 아래에 몸을 숨겨 화를 면했던 박 전 대통령도 5년 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육 여사 사망 후 철권통치를 지속하던 그는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가 절정을 이루던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피격을 당한다. 박 전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박 전 대통령 부부의 최후는 한국 현대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비극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내외의 비극은 후대로 이어졌다. 속된 말로 박 전 대통령 내외가 무덤을 뚫고 나와 통탄할 만큼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일들이 적잖이 벌어진 것이다.
불미스러운 뉴스에 단골로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EG 회장이었다. 16세 때 어머니 육 여사를 잃은 데 이어 21세 때 아버지마저 잃은 지만 씨는 청춘을 방황으로 허비하며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에 부모의 충격적인 죽음을 잇달아 경험한 그는 79년 10·26사태로 새로운 권력이 들어서자 독재자의 아들로 전락했다.
육사 졸업 후 방공포병 소위로 임관해 안정된 생활을 하는 듯했으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큰 외상을 입고 현역 부적격 판정을 받아 대위로 예편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한 술과 마약으로 인해 그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말수가 적은 데다가 친구도 없었던 그는 대통령 아들로서 느끼는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 교통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1989년부터 2002년까지 6번이나 마약투약으로 적발되어 구치소와 치료시설을 들락날락하던 그는 사창가에서 윤락녀들과 어울려 상습적으로 히로뽕을 투약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국민들로부터 분노와 동정의 시선을 동시에 받았던 그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재기가 불가능해보였지만 2004년 16세 연하의 서향희 변호사와 결혼,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2005년 48세의 나이에 아들을 얻은 그는 안정된 가정생활을 꾸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가 583억 원의 재산을 지니고 있는 재력가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또다시 구설수가 돌았다. 많은 이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마약사건으로 구속과 치료생활을 반복했던 지만 씨가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모았는지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또 최근에는 삼화저축은행 로비 연루 의혹으로 도마에 올랐다. 이와 관련 박 전 대통령의 며느리이자 지만 씨의 부인인 서향희 변호사도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지기도 했다. 서 변호사가 공동대표로 있던 법무법인 주원이 삼화저축은행으로부터 매달 억대의 공증수수료를 받은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차녀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도 적잖이 구설에 올랐다. 개인적으로 보면 근령 씨도 평탄한 인생은 아니었다. 1982년 풍산금속 창업주의 아들과 결혼한 그녀는 1년도 채 안돼 이혼했다. 그리고 홀로된 지 25년 만에 14세 연하의 신동욱 전 백석문화대 교수를 만나 결혼했지만 신 씨의 사생활 등과 관련해 심한 구설에 휘말렸다. 결혼식에는 근령 씨의 결혼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박 전 대표와 지만 씨 내외가 참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민들을 실망시킨 것은 그녀가 육영재단을 두고 형제들과 벌인 혈투였다. 그녀는 동생인 지만 씨와 육영재단 운영권을 두고 수차례 분쟁을 일으켰는데 1990년대 육영재단을 둘러싼 ‘박근혜-근령의 난’ 이후 또다시 시작된 남매의 싸움에 국민들은 혀를 찼다.
박근령-지만 남매는 육영재단을 둘러싸고 무려 수십 건의 고소와 소송을 벌이며 피튀기는 싸움을 해왔다. 임시이사 등기금지 가처분 신청, 위헌 제청뿐 아니라 폭행과 감금, 무단침입 등 삭막한 소송이 계속되면서 남매는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분위기다.
설상가상 근령 씨의 남편까지 가세하면서 형제간 갈등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처남-매형 사이의 갈등은 법적 공방까지 이어지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는데, 특히 지만 씨가 매형을 살해하려 했다는 신 씨의 주장은 사실유무를 떠나 엄청난 충격을 줬다. 신 씨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5촌 조카와 지만 씨의 비서실장 등이 자신을 중국으로 납치, 살해를 시도하는가 하면 마약을 투여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고 고소했다. 하지만 신 씨는 무고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신 씨와 처형인 박 전 대표도 사이가 좋지 않다. 지난 2009년 5월 박 전 대표의 미니홈피에는 박 전 대표와 지만 씨를 비방하는 수십 건의 글이 올라왔다. 지만 씨가 박 전 대표의 묵인하에 근령 씨로부터 육영재단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매형인 신 씨를 중국으로 납치해 살해하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특히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글을 작성한 이가 근령 씨의 남편 신 씨로 밝혀지면서 국민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이로 인해 신 씨는 박 전 대표에게도 고소당한 상황이다.
최근 열린 신 씨의 재판에는 ‘박지만 측으로부터 신동욱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박 전 대표의 5촌 조카까지 등장했다. 녹취록을 갖고 있는 키맨으로 알려진 5촌 조카는 바로 이번에 사촌 형에게 살해된 박용철 씨다. 그는 9월 26일 열릴 신 씨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었으나 끝내 핵심 비밀을 안고 사촌 형의 손에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22세 나이에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 전 대표도 한 여자의 인생치고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다. 부친의 서거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전방은 괜찮습니까?”라는 첫마디를 내뱉었을 정도로 담대하고 의연했지만 27세에 동생들을 건사해야 하는 ‘처녀가장’이 된 박 전 대표의 삶은 어찌보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것이었다.
박 전 대표는 자서전에서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다. ‘박정희 향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박 전 대표의 천군만마였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박 전 대표에게 남편에 버금가는 우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최태민 목사를 둘러싼 의혹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아킬레스건이었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정치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아찔한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2006년 5월 20일 신촌 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지원 유세 중 박 전 대표는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얼굴을 다치는 기습테러를 당해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또 2009년 5월에는 박 전 대표의 삼성동 자택에 30대 남자가 침입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면 얼굴에 염산을 뿌리겠다”는 협박편지가 배달되기도 했다. 이와 별도로 2008년 3월에는 경북 구미 박 전 대통령 생가에서 생가보존회장이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피살되기도 했다.
‘박정희 가문’은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고 육인수 의원 등 친인척 선대 의원이 8명에 이르는 한국의 대표적 정치가문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내외가 피살된 후 자손들과 그 친인척을 둘러싼 잡음과 구설이 끊이지 않는 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오죽하면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는 박 전 대표에게 ‘동생주의보’가 떨어졌을 정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