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본역을 지나 대구 방향으로 내려가는 테마열차. |
아침 8시15분. 청량리역에서 기차는 떠났다. 서울에서 화본역으로 가는 기차는 하루 단 하나. 그것을 놓치면 어쩔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해야 한다. 화본역에 서는 기차는 상하행 합해 6개. 하행의 경우 청량리 외에 강릉과 영주에서 상행은 부전과 동대구에서 기차가 출발한다.
무궁화호 기차는 느릿느릿 바퀴를 굴려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속도와 효율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듯한 요즘 시대에 무궁화호 기차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차는 씩씩하게 철로를 달리고 있다. 시골장터로 가는 할머니를 싣고,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의 여행자를 싣고, 사랑을 약속하기 위해 떠나는 연인을 싣고….
기차는 꼬박 4시간30분을 달려야 화본역에 닿을 것이다. 제천, 영주, 안동, 의성을 거치는 동안 차창에 걸리는 가을 풍경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논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샛노랗게 부서진다. 이제 곧 저 들에서 땀의 결실이 쏟아질 것이다. 책도 뒤척여보고, 잠도 청해보지만 화본역은 멀기만 하다.
기차가 이윽고 화본역에 도착했다. 내리는 사람은 겨우 셋. 의성쯤에선가 탄 엄마와 아이가 나머지 둘이다. 기차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남은 여정을 마치기 위해 궤도를 굴린다. 앞으로도 3시간을 더 가야 종착지인 부전역에 닿을 것이기에 쉴 틈이 없다.
화본역은 1938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중앙선의 오래된 역이다. 중앙선은 청량리역과 경주역을 잇는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자원 수탈을 위해 건설된 이 노선에는 고즈넉한 간이역들이 꽤 있다. 그 중 하나인 화본역은 네티즌들이 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이다. 전국의 모든 간이역들을 후보에 올려놓고 투표를 한 결과 화본역이 영예를 안았다. 주말이면 그래도 사람깨나 찾아온다는데, 거개가 자동차를 이용한 방문객들이다. 철도역을 찾기 위해 자동차라니. 아이러니한 그림이다.
▲ 화본역 건물은 한옥의 솟을대문처럼 뾰족 올라온 모습이다. |
광장에 서면 화본역 건물 뒤로 뾰족한 돌기둥 같은 것이 보인다. 원통모양으로 서 있는 게 망루 같기도 한 것이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이것은 급수탑이다. 높이 28m로 영남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급수탑은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 설치된 것이다. 요즘이야 전기로 기차가 다니지만, 예전 일제 때는 석탄을 때서 물을 데워 달리는 증기기관차였다. 따라서 석탄만큼이나 물의 보충이 중요했다. 이 급수탑이 바로 그 물보충을 위한 것이다. 자동차로 따지자면 주유소라고나 할까. 디젤기관이 상용화된 이후 기능을 다한 급수탑에는 칡넝쿨만 무성히 감겨 있다.
마을의 한길로 나간다. 화본마을은 약 500년 전 김달영이라는 사람이 개척한 부락이다. 팔공산이 남쪽에 가로놓여 있고, 조림산이 동쪽에 높이 솟아 있는 이 마을은 교통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 하다. 겨우 하루 여섯 차례 서는 기차가 마을에는 고맙고 또 고마운 존재다.
화본마을은 마치 세월의 흐름을 거부한 듯 보인다. 1962년 문을 연 성희다방, 그보다 먼저 문을 열고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노릇을 해온 역전상회 등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은 최근 벽화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한층 밝아졌다. 벽화는 삼국유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군위에는 인각사라는 고찰이 있다.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했다고 알려진 절이다. 석불좌상과 석등, 삼층탑 등의 문화재를 보유한 절이다. 벽화에는 일연의 초상도 있고, 사냥하는 화랑의 모습도 있다.
▲ 화본마을은 최근 벽화로 곱게 단장했다. |
지금은 볼 수 없는 수많은 추억들이 박물관에 가득하다. 지금의 현대자동차를 있게 한 포니, 스크래치가 잔뜩 난 엘피판, 어느 집 누렁이의 워낭 등이 전시돼 있다. 압권은 골목길이다. 60년대 달동네를 그대로 재현했다. 어두운 골목길을 누비며 옛시절을 추억해보는 맛이 참 괜찮다.
한편, 화본역 마을 주변에는 볼거리들이 꽤 있다.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의 효령면 불로리 길가에는 절벽에 새겨진 마애보살상이 있다. 고려말경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마애불은 늦은 오후에야 제대로 모습을 보여준다. 오후 5시가 넘어야 비로소 얼굴에 해가 든다.
부계면 한밤마을과 제2석굴암은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이다. 화본마을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거리에 두 명소가 있다. 한밤마을은 돌담이 아름다운 전통마을이다. 그 옆 제2석굴암은 경주의 석굴암보다 약 1세기 먼저 조성된 것으로 국보 제109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김동옥 여행전문 프리랜서 tour@ilyo.co.kr
▲길잡이: 중앙고속국도 군위IC→5번 국도→간동삼거리에서 좌회전→919번 지방도→백양삼거리에서 우회전→28번국도→이화삼거리에서 우회전 후 계속 직진→화본마을
▲먹거리: 화본역 앞에 나리식당(054-382-3070)이라고 있다. 문에 크게 ‘밥 잘 하는 집’이라고 써 놓았다. 식당을 설명하는 것 중에 그것보다 더 믿을 만한 말이 또 있을까. 돼지불고기, 돼지주물럭, 오리주물럭이 주메뉴다. 맛을 보면 거짓으로 밥 잘 한다고 광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격도 착하다. 국산재료를 쓰면서도 불고기와 주물럭(돼지, 오리) 모두 1인분 5천원이다.
▲잠자리: 화본마을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거리에 제2석굴암온천관광호텔(053-383-0002)이 있다. 지하 700m에서 끌어올린 화산 암반 온천수로 유명한 곳이다. 세계적 희귀 원소인 리듐과 스트론듐 등이 다량 함유돼 피부노화방지와 세포재생에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온천관광호텔 근처에는 대율리전통마을이 있다. 이곳에 남촌고택(054-382-2748)과 부림홍씨종택(054-382-2651) 등 고택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다.
▲문의: 군위군문화관광과 054-380-6915, 화본역 054-382-77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