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23일 은퇴식을 치른 강원FC의 이을용이 취중토크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이모! 여기는 술이 있어야 인터뷰를 할 수 있어요. 술이 없으니까 기자 분이 말을 못하시네. 알코올이 들어가야 하니까 술부터 빨리 갖다 주세요!”
강릉 바닷가에 위치한 횟집에 자리를 정하고 앉은 이을용이 이렇게 소리를 친다. 며칠 동안 심한 감기 몸살로 고생했다는 구단 관계자의 말이 거짓으로 들릴 정도였다. 이을용은 ‘취중토크’에 임하는 ‘선수’답게 제대로 몸을 만들어서 기자 앞에 나타났다. 이을용의 외침 덕분인지 곧장 술병들이 등장했고, 그 ‘이모’는 알아서 상 위에 맥주잔을 나열했다. ‘병권’을 가진 기자가 녹음기를 켜둔 채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소주와 맥주를 적당히 섞어 폭탄주를 말기 시작했다.
이을용에게 제일 먼저 제시한 축구인생 키워드는 ‘은퇴’였다.
# 은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요. 정작 은퇴식을 치르면 실감이 날까? 은퇴식 때 눈물을 흘리면 안 되는데…. 그래도 전 행복한 놈이에요. 제대로 된 은퇴식도 치르니까. 선배들 중에는 언제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는지조차 모르고 축구를 떠난 분들이 많거든요. 미련이 남았을 때 끝내고 싶었어요. 체력적인 힘이 있을 때, 더 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접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여기서 1년을 더 뛴다고 한들, 제 축구인생이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순전 개인적인 욕심을 앞세운 것이지. 선수생활에 대해 욕심을 내는 것보다는 축구인생의 제1막을 접고 제2막을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강원FC
“솔직히 팀 성적이 좋은 상태에서 그만두는 거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아요. 지금 우리 팀 성적이 최하위권에 있다 보니 팬들 보기가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에요. 요즘에는 강릉 시내에 나가서 밥 먹는 것조차 눈치 보여요. 팬들이 강원FC에 대해 어떤 기대를 했고 지금은 어떤 실망을 하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죠. 강원도는 다른 지역과 좀 달라요. 여기 사람들은 화끈하고 뜨거운 피를 가진 분들이 많아요. 그들이 원하는 축구는 지금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밋밋한 축구가 아니라 한마디로 ‘닥공’입니다. 이기든 지든 그라운드에서 무섭게 달려들고 붙어가면서 파이팅 넘치는 경기를 보여주길 원하는 거죠. 여기 바닷가 횟집 사장님들이 모두 강원FC 주주들인데 이분들의 낙은 일주일에 한 번 축구장 가서 목이 터져라 강원팀을 응원하는 거였어요. 요즘 그런 즐거움이 사라졌다고 아우성입니다. 강원도민을 위한 팀이라면 지역 팬들이 원하는 축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월드컵
“하하. 갑자기 월드컵이란 단어를 들으니까 가슴이 설레네. 제가 대표팀 생활을 11년 했는데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라면 2002년 월드컵이 되겠죠. 그때 히딩크 감독님도 스타였고 선수들도 죄다 스타플레이어였잖아요. 지금도 미국전 때의 페널티킥 실축은 큰 아쉬움으로 남아요. 그래서 욕도 많이 얻어먹었지만(웃음). 대표팀 선수들도 한국이 월드컵 4강까지 오르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어요. 경기를 치를수록 체력은 고갈됐는데, 이상하게 신바람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한국이 홈어드밴티지를 본 부분도 있었잖아요.”
# 히딩크 감독
“제 축구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죠. 귀네슈 감독을 비롯해서 명장들은 비슷한 면들이 있더라고요.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120% 뽑아내시는 능력이 있어요. 히딩크 감독님은 선수를 보는 눈이 탁월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남일, 박지성, 이천수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탄생했잖아요. 지성이는 선수들 사이에서 ‘빠꾸’로 불렸는데…. 이유요? 몰라요. 그냥 ‘빠꾸’라고 부르면 지성이가 쳐다봤으니까(웃음).”
▲ 이을용은 ❶히딩크 감독과 ❷귀네슈 감독을 자신의 축구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장으로 꼽았다. ❸2009년 강원FC와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팀 동료가 골을 터뜨리자 함께 기뻐하고 있다. |
“먼저 (기)성용이는 저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FC서울 소속일 때 제가 몸살 걸려서 대구 게임에 결장을 했거든요. 그때 제가 성용이를 적극 추천했어요. 잘 뛸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렇게 해서 성용이가 저 대신 나갔다가 골 성공시키고 바로 대표팀에 불려 들어갔잖아요. (이)청용이는 ‘바른생활맨’이죠. 성실한 선수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성공하는 것 같아요. 성용이랑 청용이는 귀네슈 감독님이 키운 선수들이에요. 게임 내보냈다가 죽을 쒀도 계속 기용을 해줬으니까. 전 걔네들 뛰는 거 보면 답답해 죽겠는데, 정작 귀네슈 감독님은 ‘아직 어리니까 그렇지, 시간이 흐르면 주전으로 클 선수들’이라며 끝까지 믿어주셨어요. 지금 그 동생들 게임 뛰는 거 보면, 귀네슈 감독님의 눈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청용이가 부상으로 재활 중이지만, 두 선수들은 반드시 더 큰 성공을 이뤄낼 거라고 믿어요.”
# 술
“고등학교 때 처음 마시기 시작했어요. 늦게(?) 시작한 편이죠(웃음). 지금 ‘술’하면 기억나는 게 대표팀 선수들이랑 마신 술들이에요. 대표적인 주당들이 있었죠. 김상식, 김영철, 이동국이요. 넷이서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밤을 새우는 건 기본이고, 직장인들 출근할 때까지 마셔대요. 가라오케 포장마차 등을 다 돌고 나면 아침이 되고 그 시간에는 모두 문을 닫잖아요. 그럴 때는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으로 향해요. 가게 앞 파라솔에서 사발면에다 김치 사다놓고 맥주에다 소주 타서 다시 마시기 시작하는 거죠. 만약 그때 우리들 모습이 사진에 찍혔더라면 ‘대박’났을걸요?”
# 별명
“저도 잘 알아요. 이을용하면 대표적인 별명이 ‘을용타’잖아요. 그 외에도 많았어요. ‘꽃보다 감자’ ‘강원도의 힘’ ‘인민군’ ‘귀순용사’ 등등. 제 외모에다 고향이 강원도라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희화화시킨 별명들이 유독 많더라고요. 맘에 드는 별명이 있냐고요? 단 하나도 없어요! 최근에는 ‘축구선수 이봉주’라나 뭐라나. 이봉주 씨한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래도 제가 그분보다는 낫지 않나요? 그런데 오늘 폭탄주, 간이 딱딱 맞는데요? 정말 맛있게 타시네.”
# 나이트클럽
# 한국철도
“울산대에 들어갔지만 정신 못 차리고 또다시 팀을 뛰쳐나왔었죠. 그때 제 손을 잡아준 분이 당시 한국철도 감독을 맡고 계셨던 이현창 선생님이십니다. 강릉상고 시절, 강릉으로 전지훈련차 오셨다가 제가 뛰는 걸 관심 있게 지켜보셨다고 해요. 울산대에서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절 찾아다니셨더라고요. 결국 이 감독님 덕분에 한국철도에 입단 후 실업팀 생활을 했고, 감독님이 혼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숙소에서 생활하는 절 안쓰러워 한 나머지 김치며 이불, 전기장판 등을 챙겨다 주시기도 하셨어요. 당시 월급을 매달 80만 원 정도 받았는데 그 돈을 저한테 주지 않으시고 따로 관리하신 다음 제가 상무 갈 때 통장으로 건네주시더라고요. 통장에는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 들어있었어요. 그 통장을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분은 감독님이 아닌 아버지셨어요.”
# 하류인생
“어렸을 때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던 건 정말 편한 직업이었죠. 친구랑 대구로 내려가 가스배관줄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적도 있었고, 공사판에서 막노동 일은 기본이고요. 울산대에서 나와 한국철도에 입단하기 전까지 약 8개월가량이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돈을 아끼려고 역전 화장실에서 잠든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한국철도 입단 후 축구가 재밌어지더라고요. 축구하는 게 즐거워지니까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어요. 그 당시에 주위의 유혹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조직세계’에서도 계속 ‘러브콜’을 보냈지만 관심조차 안 생기더라고요. 축구가 좋았으니까. 이현창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계속 ‘하류인생’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이을용은 인터뷰 직전에 들려온 고 이수철 상주상무 감독의 자살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렇게 뒷돈 받아 챙기실 분이 아닌데…, 소식 듣고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오는 1월 터키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가 1년 후에 돌아올 계획이라는 이을용은 귀국 후의 ‘로드맵’에 대해 “결국엔 강원으로 돌아와야겠죠. 팬들과의 약속이기도 하고요”라며 고향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나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을용타’와의 ‘취중토크’는 일단 1차전에서 마무리했다. 아직은 현역이고 시즌 중이라 더 이상의 음주는 무리였다. 대신 은퇴식 이후 서울에서 ‘찐하게’ 회동하기로 약속하고 고이 보내주었다. 밤 12시 전에.
강릉=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