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무한생성 가능, 계정 310여 개 운영…‘파티원’ 모집 뒤 입금되면 잠적, 피해자 787명
넷플릭스를 필두로 웨이브, 왓챠, 디즈니플러스, 티빙 등 다양한 OTT가 생겨나면서 1인당 구독 플랫폼 개수가 증가하고, 이에 따른 구독비 지출도 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1 디지털전환시대 콘텐츠 이용 트렌드 연구’에 따르면 2021년 국내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유료 구독자의 평균 구독 플랫폼 개수는 2.69개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용자들은 타인과 플랫폼 계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구독료 부담을 낮추고 있다. 공유 계정을 사용하면 혼자 비용을 낼 때보다 비용이 절반 이상 줄어드는 까닭이다. 계정 공유자는 온라인을 통해 모으는데 이를 ‘파티원’이라고 부른다. 다수의 OTT가 계정 1개당 동시접속 회선을 4개까지 지원하기 때문에 4명의 파티원이 모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예컨대 한 달 구독료가 1만 7000원인 넷플릭스 프리미엄 서비스를 4명이 나누면 1인당 4250원만 내면 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전국 15~59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계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이용자는 87.2%이다. 이들 가운데 51.6%는 가족 외 타인과 계정을 공유하거나, 공유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를 이용한 OTT 사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정주인이 온라인에서 파티원을 모집한 뒤 돈이 입금되면 잠적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OTT 사기는 2019년 넷플릭스 등 주요 업체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피해 금액이 워낙 소액인 데다 마땅히 구제할 방법도 없어 법적 처벌을 받는 사례는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피해자 787명의 대규모 OTT 사기가 발생했다. 일요신문 취재에 따르면 용의자 A 씨는 2020년 3월부터 2022년 5월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310여 개의 계정을 운영하며 파티원을 모집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OTT의 경우, 실존하지 않는 메일 주소로도 아이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계정을 무한 생성한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피해자는 787명이지만, 계정 1개당 4명이 모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대 피해자는 1200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3개월은 정상적으로 결제가 됐다. A 씨도 연락이 끊기는 일 없이 소통이 잘 됐다. 이후 구독 만료 시기가 다가오자 “외국에 나가게 돼 1년 치 자동결제를 하려고 한다” 혹은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는데, 앞으로 업무가 너무 바빠져 매달 결제를 하기 힘들 것 같다. 6개월 자동결제를 하려고 한다” 등의 말로 연장을 유도한 뒤 구독료를 따로 입금 받았다.
종종 로그아웃이 되어 있거나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는 경우는 있었으나 연락이 잘 되는 편이었고 서로 연락처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돈을 입금했다는 것이 피해자 다수의 증언이다. 피해자들은 “종종 구독권이 결제되어있지 않거나 비밀번호가 아예 바뀌어 있을 때도 있었는데, A 씨에게 연락을 하면 ‘다른 이용자가 멋대로 비밀번호를 바꾼 것 같다’며 곧바로 해결을 해줬기 때문에 의심하지 못했다”고 했다.
A 씨는 이용자 다수가 매일 OTT를 이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돈을 번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OTT를 구독해 놓고 실제로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공개한 결제 내역을 보면, A 씨는 자동결제를 빌미로 1년 치 돈을 받아간 뒤 실제로는 결제를 하지 않고 있다가 누군가로부터 구독이 끊겼다는 항의가 들어오면 그제야 결제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새로운 구독에 들어가는 비용은 또 다른 공유자를 모집해 만들었다. ‘불특정다수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유사수신 행위였다.
한 피해자는 “직장인이라 평일에는 거의 접속을 못 하고 주말에 밀린 드라마를 보곤 했기 때문에 접속 주기가 일주일에서 10일에 한 번 정도였다. 사기라는 것을 알고 나서 결제 내역을 봤는데, 매달 적게는 일주일 많게는 한 달까지 결제가 늦어진 것을 확인했다”며 “이런 식으로 2년 동안 몇 달 치 구독료를 수백 명으로부터 빼돌린 것 같다”고 했다.
개별적으로 발생하던 피해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A 씨가 본격적으로 잠적하면서다. 2020년 3월부터 2년 넘게 공유 계정을 운영해오던 A 씨는 2022년 5월 20일을 끝으로 돌연 잠적했다. 증언에 따르면 연락이 두절되기 몇 달 전부터는 구독 만료 기간이 많이 남은 파티원에게 따로 연락을 해 구독권 연장을 권유했다고도 한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A 씨는 5월 23일 해당 커뮤니티에 해명 글을 남겼다. A 씨는 “2020년 초중순 시청 목적으로 첫 공동구매를 시작했지만 그해 말 코로나로 인해 실직이 되고 설상가상 몸이 다쳐 취직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수익이 없어졌다. OTT 비용으로 나가야 할 돈이 가스비나 전기비 등 사적으로 빠지게 됐다”며 “대출을 받아서라도 해결을 해야겠다 싶어 대출을 받았었는데도 장기간 수입이 없어서 재취업 전까지 계정 5개 이상을 만들었다. 돈이 없어서 돌려 막던 OTT가 막히는 게 반복이라 문제가 계속 생겼다”고 사실상 ‘돌려막기’를 했음을 시인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을 돌려주겠다던 A 씨는 해당 글 작성 이후 또 다시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취재 결과, A 씨는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환불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에게 시간을 달라고 하면서도 OTT 사기를 치는 것을 반복해왔다.
일각에서는 개인 범죄가 아닌 2인 이상이 가담한 범죄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A 씨 소유의 계정이 밝혀진 것만 310여 개인데, 계정 1개 당 4명의 공유자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1200명이 넘는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피해자 787명 가운데 200여 명은 현재 형사고소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구제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엄밀히 따지면 계정 공유 행위 자체가 규정 위반이기 때문이다. 국내외 OTT 업체는 약관을 통해 계정을 공유하거나 재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업체 관계자는 “개인이 결제한 서비스를 가족 등 지인과 공유해 저렴하게 이용하는 것은 이용자의 선택 문제다. 하지만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의 금전거래를 통해 발생한 피해를 회사에서 구제해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OTT 업계에서는 업계 1위인 넷플릭스를 제외하고는 계정 공유 행위를 심각한 문제로 보지는 않는 분위기다. 넷플릭스가 OTT 시장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업체들은 계정 공유를 통해서라도 고객 접점을 확대하고 구독자 층을 모으는 것이 더 시급한 까닭이다.
다만, 넷플릭스의 경우 계정 공유가 불가능해질 가능성도 있다. 넷플릭스는 최근 중남미 3개국에서 가족 외 다른 사람과 계정을 공유하는 가입자에 추가 요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적으로 요금제를 변경하기에 앞서 몇 주 동안 남미 이용자를 대상으로 테스트를 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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